[정도언의 마음의 지도]세종대왕도 피하기 힘든 오해와 이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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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마음이 답답합니다. 방법은 없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애를 써서 오해를 풀어야 하나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사람 사이에 누가 누구를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정신분석가의 대답입니다. 절대적인 이해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이해는 상대적으로 그저 얼마나 조금 더 했느냐의, 백분율(%)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왜 사나요? 생존, 성공, 또는 돈을 위해서? 이유는 매우 다양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삽니다. 이해받는 느낌은 삶을 움직이는 연료입니다. 남이 나를 이해하지 않으면 사회생활도 어려워집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용돈을 타는 일도, 커서 윗사람에게 결재를 받는 일도 막막해집니다. 의사가 내 증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진으로 이어지고, 변호사가 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패소합니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나를 이해시키려고 갖은 애를 다 씁니다. 성공과 출세도 결국 나를 남들에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해시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해의 반대는? 몰이해입니다. 몰이해가 선을 넘으면 오해가 됩니다. 이해와 오해는 글자 한 자 차이이지만, 마음의 거리로 따지면 서울과 미국 뉴욕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늘 오해받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애쓰며 삽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오해하지 않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몰이해하거나 오해하는 현상은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닙니다. 우선, 내가 남이 이해가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가능성입니다. 그렇다면 이해받지 못했을 때 빨리 나를 돌아보고 고쳐야 합니다. 다음은 나를 남이 판단하는 기준이 나의 것과 다른 경우입니다. 사실 상대와 나의 삶의 기준이 쌍둥이처럼 같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것도 있습니다. 상대가 내 모습에서 과거의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연상해 나에 대해 오해를 거듭한다면? 그렇다면 제대로 된 이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나쁘게 볼 객관적인 행위를 내가 한 적이 없어도 상대는 나를 이미 그렇게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 놓고 나에 대해 상대는 “첫인상이…” “어쩐지…”라고 합리화합니다.

정말 제일 힘든 것은 남이 나를 반드시 오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때입니다. 특히 나와 남이 경쟁 구도에 속해 있는 경우에는 서로 간에 이해는 어렵고 오해는 쉬워집니다.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는 모두가 어려서부터 경쟁 구도에 푹 젖어 있어 이해보다는 오해를 하는 성향을 각자 높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해인가, 오해인가?”는 개인, 가족, 사회를 넘고 넘어 국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치권에서 갈등 구조가 반복되는 양상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해를 하려하기보다는 전력을 다해 오해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사회생활에서도 서로 이해하는 사이는 아군으로 삼고 오해하고 싶은 대상은 쉽게 적군으로 내몹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받지 못한다고 ‘죽고 사는’ 일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관계가 멀어지거나 끊어질 뿐입니다. 이때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은 남이 나를 오해한 바를 그대로 따라 나를 그런 사람으로 스스로 규정해 버리는 어리석음입니다. 상대가 나를 오해해서 나쁘게 보았다고 스스로 나를 그렇게 단정한다면 상대의 나쁜 의도에 휘말리게 됩니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소의 믿음을 정서적인 충격 속에서도 정신 차리고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고, 내가 지닌 잠재성과 가치를 존중하며, 내 삶의 의미를 찾아 발전해 갈 수 없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그렇게 대접해 주겠습니까? 상대가 나를 오해했더라도 그냥 받아들이세요.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문제일 뿐입니다. 속이 상한다고 거기에 휩싸여 스스로 변해간다면 나중에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니 오해의 늪에서 과감하게 발을 빼고 용감하게 이해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나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남의 눈치에서 벗어나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어차피 삶에서 부딪히는 오해에 대한 면역력을 길러야 보람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이해와 오해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멀지만 경계선은 아주 좁고 턱은 얕습니다. 세상이 모두 존경하는 훌륭한 분들도 이런 취약성을 피해 가기 어려웠습니다. 한문을 숭상하는 학자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나 왜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말만 많았던 임금과 그 신하들로 인해 여러 번 겪으신 이순신 장군이 그러했습니다. 이해와 오해를 구분하는 능력은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습득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현재의 상황을 지켜 보아도 그러합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 박사도 초기에는 오스트리아 빈 의학계에서 ‘상종 못 할 ×’으로 집단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으로 ‘성욕설’을 주장하자 ‘섹스나 밝히는 인간’ 취급을 받아 강연 중간에 여성들을 사회자가 모두 내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튼튼하고 높은 벽을 세워 이해가 오해로 넘어가는 일을 막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벽 세우기가 아니고 융통성이 해법이 되어야 합니다. 벽만 세우면 오해에서 이해로 넘어가는 길도 동시에 막힙니다.

‘융통성’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말합니다. 개인으로서는 늘 개방된 의식을 지켜서 내가 남을 오해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아야 변화의 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사회나 국가로서는 삶의 다양성에 대한 계몽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중매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역시 경쟁 구도에 몰려서 이해보다는 오해를 부추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가짜 뉴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정말 복잡하고 인간성은 너무 취약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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