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관철동 삼일빌딩과 녹의 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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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금속 외관으로 시간의 힘을 보여주는 서울 관철동 삼일빌딩(1970년 건축).
녹슨 금속 외관으로 시간의 힘을 보여주는 서울 관철동 삼일빌딩(1970년 건축).
1970년 10월, 서울 청계천 옆 종로구 관철동에 삼일빌딩이 들어섰다. 지하 2층, 지상 31층.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이 빌딩은 금세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서울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고, 빌딩 주변은 층수를 세는 노인과 아이들로 늘 북적였다.

건물 주인은 삼미그룹의 창업주인 김두식이었다. 그는 당시 삼미사의 모태인 대일목재공업의 사옥으로 쓰기 위해 이 빌딩을 지었다. 그런데 기업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삼일빌딩으로 이름 붙였다. 김두식은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층수도 31층이다.

김두식은 착공과 준공도 3월 1일에 맞출 생각이었다. 일정이 여의치 않아 그렇게 하진 못했지만 3·1운동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바로 앞 종로 쪽 건너편이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이라는 점도 작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일빌딩은 1970년 준공 이후 1985년 서울 여의도에 63빌딩이 들어설 때까지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군림했다. 1970년대 국내 초고층 건축의 시발점이었고 개발시대의 상징물이었다. 삼일빌딩은 당시 정부의 자랑거리였다. 홍보물은 물론이고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이 건물을 두고 “개발도상국의 열등의식을 해소하는 계기”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설계자는 당대의 대표 건축가인 김중업. 건물은 네모반듯한 형태로 멋 부리지 않고 31층까지 단순하게 쭉 올라갔다. 외벽 색깔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검은색 톤이다. 이름만큼이나 우직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삼일빌딩의 또 다른 매력은 외벽에 마감 처리한 특수금속이다. 금속을 자연 상태로 노출시켜 녹슬게 한 것이다. 녹슨 금속을 건물에 사용하다니, 당시로서는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비 오는 날, 물에 젖은 녹슨 금속은 그 진한 색깔로 묵직함을 보여준다. 햇살이 비치면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설치미술 같은 느낌을 준다.

요즘 지은 주변의 다른 빌딩과 비교해보면 삼일빌딩의 매력은 더욱 두드러진다. 주변 건물들은 한껏 멋을 내면서 열심히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삼일빌딩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건물의 이름도 그렇고, 검은색 톤의 녹슨 외벽도 그렇다. 녹슨 것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그 절제의 미학.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삼일빌딩의 진정한 매력이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서울 관철동 삼일빌딩#삼미그룹#김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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