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독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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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
“한때 넌 뭇 건축인들의 ‘공공의 적’이었지.”

몇 년 만에 만나 맥주 두 잔을 함께한 친구가 들려준 말이다. 가볍게 흘린 우스개였지만 무겁게 맺혔다.

상황과 분위기의 여러 조각을 미루어 끌어모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과 눈 또는 귀로 명료하게 확인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이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잖아’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됐다”는 이별 통보에 무덤덤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까닭으로 인해 건축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공의 적으로까지 언급됐는지 디테일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뱃심도 없다. 대강 헤아려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안간힘을 써야 한다.

어설픈 공부에 의지해 어설픈 글을 내놓았고, 때로는 그 어설픈 지식의 눈에도 그릇됐다 판단한 흐름에 저항하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이 어떠했든 모든 것은 손놓음과 눈감음 사이의 선택권을 쥐고 있던 개인의 업보일 따름이다.

리비도의 확연한 소멸에 대해 서서히 안심해 가고 있다는 친구는 “그래도 난 무언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욕망이 그치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그 마음 상태가 부럽다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정확히 무엇이 부러운 걸까’ 생각했다. 어렴풋하지만 그럭저럭 짐작은 됐다.

샤워를 하고 앉아 친구 두 사람이 새로 쓴 책 두 권을 천천히 넘기며 읽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더 성실해져야 할 독자’이리라는 짐작을 확인했다.

“이제는 뭐든 비판하는 글 쓰지 마. 좋은 말만 해.”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선배의 농담에 실없이 으허허 웃었다. 모든 것은 그쳐 잊힌다. 책은 이미, 충분히 많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루이스 칸#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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