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붙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 시험 지상주의의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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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국민의 탄생/이경숙 지음/452쪽·2만5000원·푸른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학교 교문 앞에서 한 어머니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시험은 평생의 좌표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수단이다. 동아일보DB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학교 교문 앞에서 한 어머니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시험은 평생의 좌표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수단이다. 동아일보DB
최근 가까운 친척이 무리해서 서울 목동으로 이사를 갔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 때문이다. 친척은 “동네 재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덩달아 인근 A고교의 명문대 진학률도 크게 떨어졌다”고 푸념했다. 그는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전국 고등학교를 서열화하는 게 현실이니 이사라도 가야 한다”고 했다. 20여 년 전 A고교를 졸업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실제로 불과 20년 사이에 A고교의 대학 진학률에 큰 변동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주거 여건의 변화에 따른 사회 계층화가 교육에 끼치는 ‘살벌한’ 영향에 소름이 끼쳤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교육과 시험 제도를 사회사 관점에서 집중 연구해온 학자다. 책은 대학입시와 국가고시 등 각종 시험 제도가 극심한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게 정의라는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에서 시험은 마치 일상의 공기처럼 당연한 걸로 여겨진다. 저자가 상세히 설명하는 중국 수나라 이래 1000년 넘게 이어진 과거제 역사는 시험의 뿌리 깊은 연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철학자 존 롤스가 주장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능력주의의 함정이다. 실제로 이른바 ‘강남 3구’ 출신의 명문대 및 로스쿨 입학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최근 학생부종합전형이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지적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제는 능력주의를 앞세운 시험 지상주의가 엘리트주의와 결합해 ‘불합리한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예컨대 정규직,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 못지않게 명문대와 비명문대 출신 사이의 임금격차도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평균 연봉이 노동자들의 20배(1965년)에서 276배(2015년)로 크게 벌어져 사회문제가 됐다. 비상식적인 차별이라는 지적에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의 대응은 어쩌면 무책임할 수 있다. 저자는 “엘리트들이 권력자들과 야합해 점점 더 폭리를 취하는데도 그들을 비판할 주체도 근거도 사라지고 있다”고 썼다.

시험 지상주의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악용돼 민주주의에 역행할 수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볼 만하다. 예컨대 과거제도는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성리학 지배질서를 사회적으로 확대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국에 과거제를 뿌리내린 당 태종이 “천하의 영재가 모두 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큰소리를 친 이유다.

일본 제국주의도 제국대학과 각종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식민주의에 적극 활용했다. 1934년 경성제국대 예과 입시에서 수학, 영어 과목은 200점 만점이었던 데 비해 일본어는 무려 600점이나 배점됐다. 일본어보다 한국어 교육에 힘쓴 뜻있는 조선인들을 고등교육에서 배제하고 내선일체를 강요한 조치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시험국민의 탄생#이경숙#시험#시험 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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