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들 먹여살려야 한다고 호소해도 소용없어” 페버의 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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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아이들]<상>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버림받은 아이들’
보호소에 갇힌 18세 페버
이 악물고 공부해 자격증 3개… 가족들 생계 위해 공장 취업
천식 심해져 숨쉬기 어려울 때도
전문가 “약자 구제 절차 마련해야”

미등록 청소년인 페버 군(18·위쪽 사진 뒷줄 오른쪽)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북의 한 공장에서 두 달간 일하던 중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불법취업 단속에 걸렸다. 그에겐 엄마와 한 살 위 누나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인 동생 3명이 있다. 아래쪽 사진은 페버군이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자필 편지. 그는 “피부색만 다를 뿐 토종 한국인”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페버 가족 제공
미등록 청소년인 페버 군(18·위쪽 사진 뒷줄 오른쪽)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북의 한 공장에서 두 달간 일하던 중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불법취업 단속에 걸렸다. 그에겐 엄마와 한 살 위 누나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인 동생 3명이 있다. 아래쪽 사진은 페버군이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자필 편지. 그는 “피부색만 다를 뿐 토종 한국인”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페버 가족 제공
“이미그레이션(출입국관리사무소), 이미그레이션!”

지난달 13일 충북 청주의 한 공장에 승합차 여러 대가 들이닥치자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공장 뒷문에서 일하던 페버 군(18)은 승합차를 보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을 뒤로하고 냅다 달리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날 잡으러 왔어. 지금 도망치고 있어!”

페버 군의 전화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끊어지자 충격에 빠진 엄마 조널 씨(46)는 두 다리가 풀렸다. 엄마는 청주출입국관리사무소로 달려가 “페버는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이고 천식이 심하니 잠시만이라도 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는 17세가 넘으면 법에 따라 구금할 수 있고 풀어 주면 도주할 게 뻔하다”는 차가운 답만 돌아왔다.

○ 미등록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죄

페버 군은 1999년 한국에서 나이지리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합법 비자로 1997년 엄마와 한국에 온 아빠는 수차례 귀화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10년 전 비자 연장을 못 해 나이지리아로 강제 출국됐다. 아빠가 불법 체류자로 지목되며 동반 비자를 갖고 있던 엄마와 배 속 아기까지 5명이나 되는 남매는 미등록자(불법 체류자)로 전락했다. 엄마는 모국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 냈다. 남편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고 임신한 몸으로 4남매를 나이지리아에서 먹여 살릴 길이 막막했다.

엄마는 강하게 마음을 먹고 호랑이 굴로 들어가듯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애쓴 결과 자신은 일시적 체류 허가를 받고 다섯 남매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국내에 체류하도록 허가받았다. 페버 군 가족은 이웃의 후원금을 받아 근근이 먹고살았다. 페버 군이 다니던 서울 이태원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 A 씨는 “남매들이 학교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 예의 바르고 반듯해 사람들이 매달 30만 원씩 모금해 도와줬다”고 말했다.

페버 군은 가족을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고교 3학년 때 친구인 박모 씨(19)는 “페버가 자격증 시험공부를 할 때 이해를 제대로 못 해 친구들이 놀렸지만 결국 자격증을 3개나 땄다. 돈을 벌어 동생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고 했다”고 전했다.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직장을 찾아 헤맨 페버 군은 청주에 일자리를 잡고 주말마다 전남 순천으로 돌아와 가족을 돌봤다. 후원금에만 기대 살 수 없어 일을 시작했다가 추방 위기에 놓인 것이다. 법률사무소 메리츠의 김봉직 변호사는 “국가안전, 사회질서, 공중보건 등 국익을 해치는 사람이 아닌데도 예외 없이 구금하고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는 건 인도주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 출산하느라 비자 연장 못 한 미혼모

미등록 이주민들은 한국이 너무 쉽게 불법 체류자 낙인을 찍는다고 하소연한다. 모국 케냐와 무역 사업을 하는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7년 전 한국에 온 제니퍼(가명·32) 씨도 그중 한 명이다. 한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끝내고 구직비자를 받은 그는 지난해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한국에 유학 온 케냐인 엘리트란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갑자기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됐고 남자친구는 홀연히 모국으로 떠나 버렸다. 낯선 한국에서 홀로 출산하고 몸조리하느라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구직비자는 만료가 됐고 미혼모에 불법체류자란 딱지까지 붙었다.

애를 맡길 곳이 없어 불법 취업도 못하니 생계가 힘들어진 제니퍼 씨는 모든 것을 합법으로 되돌려 놓기로 마음먹었다.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아이를 한국에 두고 케냐로 돌아가 한국대사관에서 새 유학비자를 받고 아들 출생신고도 마쳤다. 합법 외국인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들은 여전히 미등록 아동이다. 아들을 외국인으로 등록하려면 그간 불법 체류에 대한 과태료 100만 원을 내야 하기 때문. 기부금에만 기대 사는 제니퍼 씨는 과태료를 낼 수가 없다. 이주민센터 ‘친구’의 조영관 변호사는 “미혼모 외국인들은 출산 과정에서 비자를 연장하기 힘들어 쉽게 불법 체류자가 된다. 이런 약자를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부모의 ‘위장결혼’에 국적 잃는 소녀

한국인으로 살던 아동이 부모의 위법으로 갑자기 국적을 잃고 미등록 신세가 되기도 한다. 중학생 김미연(가명) 양은 아빠가 엄마가 아닌 이모와 위장 결혼한 사실이 최근 적발돼 갑자기 국적을 잃고 학교까지 못 다닐 위기에 처했다. 중국인이었던 아빠는 한국인으로 귀화한 뒤 한국인이 되길 원하는 중국인 이모의 ‘국적 세탁’을 위해 위장 결혼을 해주며 미연이를 두 사람의 딸로 서류에 올렸다. 이번에 이 사실이 경찰에 적발돼 부모가 한국 국적을 잃었고 미연이도 자동적으로 국적과 출생신고까지 모두 취소되게 생겼다.

미연이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변호사는 “불법을 저지른 부모는 당연히 처벌받아야겠지만 부모에게 이용당한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 / 청주=노지원 / 김예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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