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점 캐내 협박하고 정보 얻으면 버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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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美스파이 포섭 작전
대담하게 고위 관료들에 접근… 공개자료 요청하며 친분 키워
‘러 내통’ 의혹 플린 前보좌관처럼 상대가 금품 밝히면 돈으로 유혹
“北-中도 조만간 러 수법 모방할것”


‘남자 1번을 포섭하라!’

본국의 지령을 받은 러시아 첩보원들이 미국 뉴욕의 한 에너지 산업 심포지엄 행사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에너지 기업 임원들과 정보를 나누고 있던 한 금융인에게 다가갔다. 지난해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캠프 외교 고문으로 일했던 카터 페이지였다.

미국 CNN방송이 16일 FBI 공소장과 전직 정보 관료의 증언을 토대로 보도한 2013년 러시아의 미국 내 스파이 포섭 작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엔 사무소 직원으로 위장한 첩보원들은 페이지와 업계 정보를 나누고 헤어지며 e메일 주소를 주고받았다. 첩보원들이 e메일로 ‘미국 행정부의 에너지 산업 보고서를 달라’고 요구했고 페이지는 의외로 선뜻 응했다. 첩보원들은 “저 사람 바보 아니야? 포섭할 만하다”라며 낄낄 웃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렇게 포섭된 페이지가 이후 스파이 활동을 계속했는지 수사 중이다. 페이지는 “그들이 러시아 첩보원인 줄 몰랐다. 난 공식적으로 공개된 자료만 줬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대선 전 러시아 내통 의혹 광풍 속에서 그 또한 ‘러시아 스파이’란 낙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냉전시대의 적이던 러시아와 내통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지만 페이지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러시아 첩보원들은 미국의 정계와 금융계 인사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은밀하게 시작될 것 같은 스파이 포섭 작전은 핵심 인물을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 합법적인 부탁을 하며 의중을 떠보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CNN에 따르면 러시아 정보원들이 미국인 스파이를 포섭하는 첫 단계는 스파이 후보와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것이다. 술을 화끈하게 마시며 우정을 쌓든, 연애를 하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두 번째 단계로 간첩 티를 내지 않으면서 스파이 후보의 성격과 직업 등을 파악한다. 스파이 후보에게 ‘영양가 없는’ 보고서를 넘겨 달라고 해 본다. 후보가 보고서를 건네주는 태도나 표정을 보며 정보를 얼마나 잘 줄 인물일지 가늠한다.

러시아 당국은 이어 ‘스파이로서 합격점’이라고 판단한 후보를 더욱 집요하게 취재해 비밀이나 치명적 약점을 포착한다. 관계가 무르익으면 원하는 정보를 달라고 요구해 보고 후보가 망설이면 미리 파악해 둔 약점을 볼모로 정보를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상대가 돈을 좋아하면 일이 쉬워진다. 실제 ‘러시아 내통’ 논란으로 낙마한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돈에 넘어간 사례로 보인다. 그는 러시아 기업에서 강연한 대가로 돈을 챙겼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일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원들의 스파이 활용 마지막 단계는 임무를 완수한 스파이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FBI 도청 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첩보원들은 페이지 포섭 공작이 완료된 뒤 “그에게서 자료를 받고 나면 꺼지라고 하자”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러시아의 첩보원 포섭 전략이 행정부 근처에 미칠 정도로 과감해져 이들의 전략을 제대로 파악하고 방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 첩보원으로 위장한 FBI 첩보원이었던 나비드 자말리 씨는 경제 전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에 “예전에 군 장성이나 미 첩보원을 비밀스럽게 포섭했던 러시아는 이제 합법적이고 당당하게 고위 관료들에게 접근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나 중국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 이런 스파이 기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러시아#첩보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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