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청소년용 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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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몰 미로가 들어서기 한참 전인 1980년대 후반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 반지하 대형 서점이 한 곳 있었다. 널찍한 중정(中庭) 쪽으로 커다란 창을 틔워 놓은 그 서점 안에서 10대 때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점에서 책 말고는 달리 파는 물품이 없던 시절이었다. 서고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몇 권 넘기다 보면 창가 볕이 불그스름해졌다.

독서의 동력 중 하나는 지적 허영심이라고 생각한다. 소화 못할 단어로 그득한 페이지를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욕심껏 눈에 우겨 넣어 넘기곤 했다. 한자 빼곡한 책을 훑어 넘기는 꼴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한 중년 신사가 다가와 말했다.

“학생, 이 책은 너무 어려워. 저쪽에 같은 내용을 쉽게 풀어 쓴 학생용 책이 있으니 한번 봐.”

돌이켜보면 참말 고마운 호의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때도 오만방자했던 나는 그분 말씀을 잠깐 듣는 시늉만 하고 다시 ‘성인용 책’ 쪽으로 돌아왔다. 행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발휘하지 못하는 허망한 가치관의 명제들이 머릿속에서만 구차하게 굴러다니게 된 데는 그때의 어리석음 탓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10대 학생이었을 때의 나는 어째서 ‘학생용 책’을 보기 싫어했을까. 그 버릇이 여전히 남아서인지 책팀 주간회의 때도 청소년용 책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지난주 우연히 청소년용 책을 주로 내는 한 출판사 대표를 만나 그렇게 하는 까닭을 물었다.

ⓒ오연경
“서구의 청소년책 시장 규모는 전체 책 시장 판도를 흔들 정도로 큽니다. 한국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찾아 읽는 독자가 존재하니까요.”

어째선지 부끄러웠다. 주말에 읽을 청소년용 책을 한 권 챙겼다. 30년 만에.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대형 서점#청소년용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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