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오래된 집착을 내려놓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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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무엇인가에 몹시 놀란 사람이 비슷한 사물만 보아도 겁을 낸다는 뜻이죠. 이와 가장 비슷한 정신분석 용어는 ‘전이(轉移)’입니다. 보통은 ‘자리나 위치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김’이지만 분석에서는 ‘어떤 대상에 향하였던 감정이 다른 대상으로 옮아감’을 뜻합니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당장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 주며 힘들면 안아 주는 생명줄입니다. 아버지도 장난감 살 돈을 벌어오고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 주며 놀이공원에 데리고 가는 중요한 존재임을 점차 알게 됩니다. 부모는 내 대상관계의 출발점이자 기반입니다.

정신분석가는 세상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 많이 압니다. 매주 4회를 만나, 45분 동안, 수년 동안 내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고 있으니 분석은 나의 현재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현재에 되풀이하며 삽니다. 나는 내 분석가에게 어머니의 따뜻함과 아버지의 엄격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이 현상입니다. 분석가와 늘 같이 있지 못해서 허전하게 느낀다면 ‘전이 신경증’에 가까워진 겁니다.

멀쩡하던 사람을 정신분석을 통해 환자로 만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창시자 프로이트도 초기에는 전이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전이가 분석에 매우 쓸모 있는 도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상담이나 정신치료에서는 전이 현상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환자는 그저 일상에서 있었던 일을 마치 일기장 읽듯이 이야기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보다 네 배나 자주 만나는 정신분석에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일상의 일도 이야기하지만 분석이 깊어지면 분석받는 사람은 교묘하게 여러 방법으로 분석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여러 방법’이란 직구 스타일이 아닌, 다양한 변화구로 전이가 분석가에게 던져진다는 말입니다. 분석가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표현하기보다는 과거나 현재의 다른 사람을 빗대어 돌려 말합니다. 미운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분석가는 우선 전이 현상으로 생긴 호불호(好不好)를 현실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 대신인지를 알아내고 의미를 탐색한 후 해석해야 합니다. 전이가 제대로 해석되면 분석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를 더 많이,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 그저 다른 사람 이야기만 나누고 있어서는 분석이 정체됩니다. 밖에서 배달되다가 식어버린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분석 시간에 분석가와 분석받는 사람이 직접 만들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먹고 소화시켜야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분석가의 방은 식당의 주방과 같습니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곳이지 배달 도시락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전이의 개념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의식적인 것도 넣는 것으로, 분석가의 용모, 태도, 말투 같은 현실적인 측면도 고려하는 것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전이 현상을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보는 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합니다. 전이를 다루지 않는 분석은 ‘팥 빠진 찐빵’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면 늘 주고받기 마련입니다. 전이가 있으면 ‘역(逆)전이’도 있습니다. ‘역전이’란 분석가가 환자에 대해 느끼고 행하는 전이 현상입니다. 분석가 자신의 과거를 분석 현장에 불러오는 겁니다. 역전이 역시 처음에는 장애로, 분석가 자신의 분석이 모자라서 생기는 일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이 역시 분석 과정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는 도구로 여깁니다.

왜 나는 이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고 잠이 쏟아질까? 분석가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내 역전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일까? 스스로를 분석합니다. 이 사람이 내 과거의 누구와 비슷해서일까? 질문이 이어지고 분석이 진행됩니다.

전이와 마찬가지로 역전이도 숨 쉬는 인간이면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우리 누구나 상대방이 이유 없이 좋거나 미우면 다 그 이유가 과거에 숨어 있습니다. 내 무의식에서 현재의 솥뚜껑이 과거의 자라와 이어져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정신분석은 솥뚜껑을 자라와 연결시키고, 그 의미를 찾아내서 분석받는 사람에게 돌려줌으로써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삶을 편집해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마음의 편집 작업은 워드프로세서로 하는 글 편집과 다르지 않습니다. 새롭게 해석되어 이해된 부분을 추가하고 진부하거나 부적절한 것들은 삭제하며 전체의 모습을 다듬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중요하다고 꽉 붙들고 있던 생각들을 날려버리니 내 전체 삶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마음이 편집되려면 전이 해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 편집 과정에서 분석가가 자신의 마음속 역전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워드프로세서가 제대로 일을 합니다. 그래야 오타가 나지 않고 엉뚱한 삭제, 불필요한 붙여넣기, 저장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현대 정신분석은 객관적 진실보다는 분석을 받고, 돕는 두 사람의 무의식이 만나 만들어 내는 주관성에 관심을 새롭게 기울이고 있습니다. 정신분석은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 사이의 ‘놀이’ 또는 ‘이야기 만들기’입니다. 두 사람이 모여 같이 하는 ‘글쓰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에서 전통적으로 강조해 오던 분석가의 익명성, 중립성, 절제는 이제 더 이상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프로이트 시대와 달리 이제는 검색하면 분석가에 대한 수많은 신상 정보가 쉽게 손에 들어옵니다. 분석가가 상대방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말도 거북합니다. 분석가는 돌부처가 아닙니다. 좋고 싫음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해야 분석에 도움이 됩니다. 단, 전문가로서 분석을 받는 사람과의 경계를 지켜야 함은 당연합니다. 분석가도 절제의 원칙에 매이기보다는 즐거움, 지겨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로만 이어진다면 분석의 가치는 늘어납니다.

정신분석은 분석을 받는 사람의 무의식과 분석가의 무의식이 서로 자극과 반응을 주고받으며 써 나가는 드라마입니다. 그 과정에서 전이와 역전이는 드라마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틀이자 아주 쓸모 있는 분석 도구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집착#정신분석가#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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