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에 사고파는 ‘시험족보’… 이젠 거래 알선업체까지 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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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모범답안지 매매 만연

서울의 한 사립대에 다니는 고모 씨(24)는 최근 전공과목의 ‘족보’를 샀다. 기출문제와 답안을 정리한 족보 3개를 사는 데 10만 원을 썼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치열한 학점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쩔 수 없다. 고 씨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돈을 주고 족보를 산다”며 “취업 준비를 위해 A 학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족보는 대학가에서 출제된 시험문제나 시험 준비용으로 핵심만 정리된 필기노트를 뜻한다. 과거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대가 없이 선물하던 ‘내리사랑’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제 돈벌이 수단으로 바뀌었다. 학과 구성원들의 연대감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고 취업난에 개인 공부에만 매달리다 뒤늦게 족보를 구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 “귀한 족보 10만 원에 팝니다”

한 과목당 족보 가격은 보통 3만∼5만 원에 이른다. 보통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로 거래되는데 최근에는 족보 거래를 알선하는 업체까지 생겨날 정도로 전문적이고 상업적인 성격까지 띠고 있다.

고 씨가 족보를 산 곳도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다. 시험 때만 되면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족보를 매매하자는 글이 줄지어 올라온다. 최근 1개월간 서울대 ‘스누라이프’에 41건, 연세대 ‘세연넷’에 49건, 고려대 ‘고파스’에 56건의 족보 매매 글이 올라왔다. 하루 평균 1.5건이 넘는다. 족보를 돈 주고 사려는 이들이 늘면서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족보 게시판’까지 생겼다. 수업 필기 양이 많은 문과생들이 주로 족보를 찾는다.

적극적으로 족보를 판매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들은 “구하기 힘든 귀한 족보를 파니 가격을 후하게 쳐달라”며 판촉에 나서기도 한다. 일부 “성의만 받겠다”며 커피 모바일 상품권을 바라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귀한 족보’임을 내세우며 현금을 요구한다.

거래 역시 철저히 온라인을 통해 이뤄진다. 판매자들은 직접 만나기보다 현금으로 계좌 이체 받는 방식을 선호한다. 돈을 받으며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이나 e메일로 구매자에게 족보를 보낸다. 한 대학생은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가 선후배 교류의 장이 아닌 족보를 사고파는 장터로 변질된 것 같아 씁쓸하다”며 “일부 학생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 때문에 눈살을 찌푸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 판매 대행업체는 ‘호황’

족보를 사고파는 대학생이 늘면서 대신 판매해 주는 업체까지 생겼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한 대행업체는 인터넷으로 족보를 판다. 홈페이지에서 과목명이나 교수명만 입력하면 간단히 족보를 내려받을 수 있다.

이 업체에서 파는 족보 가격은 과목당 5000∼1만 원이다.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구하는 것보다 쉽고 저렴해 6개월 만에 다운로드 수가 1만 건을 넘었다. 업체 관계자는 “다른 학생이 족보를 내려받으면 족보를 올린 학생은 수수료를 뺀 60%를 받게 된다”며 “입소문을 타면서 보유한 족보도 늘고 경쟁 업체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취업 한파로 인한 학점 경쟁이 빚은 하나의 현상으로 진단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동아리나 학회 활동이 줄어들면서 족보조차도 부탁할 선배가 없는 것이 대학생들의 현실”이라며 “학점 경쟁이 치열하니 돈을 주고서라도 족보를 꼭 구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래전부터 지속된 대학가의 개인화와 상업화가 만들어 낸 우울한 현실”이라며 “족보는 학생들이 거래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 교수가 갖고 있는 일종의 지식재산권으로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재 hoho@donga.com·김하경 기자
#대학#시험#족보#매매#알선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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