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부시 찾아 손주 얘기… 한국엔 없는 ‘전직들의 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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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선물입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9일 전임자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텍사스 주 휴스턴 자택을 찾아가 강아지와 벌이 그려진 양말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 출처 빌 클린턴 트위터
“양말 선물입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9일 전임자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텍사스 주 휴스턴 자택을 찾아가 강아지와 벌이 그려진 양말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 출처 빌 클린턴 트위터

정적(政敵)에서 절친으로.

미국의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93)와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71)의 관계 변화는 이렇게 요약된다. 두 사람이 맞붙은 1992년 대선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은 22세 연상인 아버지뻘 부시 전 대통령을 인정사정없이 몰아 세웠다. 건강 문제를 약점 잡았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조롱했다. 적수에서 친구로 진화할 수 있는 계기를 먼저 만든 사람은 승자(클린턴)가 아니라 패자(부시)였다.

재선에 실패한 부시 전 대통령은 1993년 1월 20일 백악관을 떠나면서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친애하는 빌에게.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일 것입니다. 당신의 성공은 이제 우리나라의 성공입니다. 나는 당신을 열심히 응원할 겁니다. 조지.”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인 1999년 2월 요르단 국왕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 부시 전 대통령을 함께 태웠다. 두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훗날 부시 전 대통령은 이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클린턴 행정부의 노선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대화를 통해) 클린턴이 많은 이슈에 해박한 인물임을 알게 됐다”고 평가했다.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전직 대통령은 체험적으로 증명했다.

2005년 동남아 지진해일(쓰나미) 피해 때 두 사람은 세계를 같이 누비며 구호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부시 전 대통령은 “나는 ‘클린턴이란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모금 여행을 함께 다니면서) ‘내가 진짜 클린턴을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부시 전 대통령의 부인 바버라 부시 여사(92)는 “(사생아로 태어난) 클린턴은 남편을 마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대하듯 극진히 모셨다”고 말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매년 주기적으로 부시 전 대통령 내외를 찾아 식사를 함께 하며 안부를 물어왔다. 9일에도 그는 텍사스 주 휴스턴에 묵고 있는 부시 전 대통령 부부를 방문해 “아이들과 손주, 과거와 새로운 시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정말 좋다”고 트위터에 소개했다. 양말 수집광인 부시 전 대통령에게 강아지와 벌이 그려져 있는 녹색, 갈색 양말을 선물하는 사진도 함께 올렸다.

전직 대통령들 간 정파와 나이를 초월한 ‘아름다운 우정’을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권좌에서 물러나서도 ‘실익이 없다’는 정치적 판단이 앞서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사 동기이고, 1979년 12·12쿠데타를 함께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차례로 대통령을 지낸 친구 사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취임 뒤 ‘5공 청산’ 차원에서 전 전 대통령이 2년 동안 백담사로 쫓겨 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김영삼(YS) 정권 때인 1996년 내란죄로 나란히 구속 기소돼 수감생활을 한 이후에도 줄곧 서먹한 사이로 지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YS는 민주화 투쟁의 두 거목이었지만 이들 역시 사이가 좋지 않았다. DJ 정부 초기 YS 주변 인사에 대한 사정 바람이 일자 YS는 DJ를 향해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서거한 뒤 DJ가 당시 이명박(MB)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라고 비난하자 YS는 다시 DJ를 향해 “그 입을 닫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병환이 깊어진 상대를 찾아가 위로하는 게 전부였다. YS는 2009년 8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던 DJ를 문병했고, 전 전 대통령도 2014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울 연희동 자택을 찾았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 박성진 기자

#클린턴#부시#전직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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