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결혼은 사랑의 시작인가, 환상의 끝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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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로런 그로프 지음·정연희 옮김/608쪽·1만6500원·문학동네

사랑하는 사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책을 읽다 보면 1994년 개봉한 영화 ‘세 가지 색: 블루’가 오버랩된다. 영화는 교통사고로 유명 작곡가인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성이 남편의 사망 이후 그에게 숨겨둔 애인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영화사 제공
사랑하는 사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책을 읽다 보면 1994년 개봉한 영화 ‘세 가지 색: 블루’가 오버랩된다. 영화는 교통사고로 유명 작곡가인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성이 남편의 사망 이후 그에게 숨겨둔 애인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영화사 제공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태양의 위치에서 보면 결국 인류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는 그저 회전하며 깜빡거리는 빛일 뿐이다. (…) 구체적인 것은 한곳에 초점을 맞출 때야 보인다.”

어느 해변, 갑자기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린다. 바다를 비추던 빛이 회색으로 흐릿해졌을 때 두 사람이 등장한다. 플로리다에서 생수 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토라는 남자, 그리고 부모 없이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 왔지만 매력이 넘치는 여자 마틸드다. 둘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만난 지 2주 만에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결혼했다.

사랑에 빠진 소설 주인공들의 첫 등장치곤 어두웠던 분위기가 그들의 결말을 암시한 것 같다. 두 사람은 끝내 멀어지고 만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서다. 우연한 기회에 새삼 서로의 삶에 큰 간격이 있었음을 느낀 두 사람에겐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책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남편의 관점(운명)과 아내의 관점(분노)으로 나누어 썼다. 소설의 구성에 따라 처음엔 남편의 관점에서 아내를 바라보게 된다. 남편의 눈에 비친 아내는 남편과 함께일 때 빛나고, 남편을 배우에서 극작가로 성공시키면서 기쁨을 느끼는 평범한 여성이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 아내의 시각으로 펼쳐진 여자의 삶을 맞닥뜨리며 일종의 ‘반전’을 경험한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건 신화에 불과한 걸까. 마틸드는 네 살 때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뒤 매춘부로 일하는 외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고, 할머니의 죽음 이후엔 불법적인 일을 하는 외삼촌의 집으로 보내진다. 이후 이름까지 바꿔 가며 불우했던 과거를 지우려 하지만 상처 받은 어린 시절은 여전히 마틸드를 괴롭힌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 로토는 아내의 충격적인 과거를 우연히 듣게 되고 아내에 대한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러곤 “말하지 않았다는 건 커다란 거짓말”이라며 그녀를 탓한다.

책은 ‘동시대 가장 뛰어난 미국 작가 중 한 명’, ‘산문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미국 소설가 로런 그로프의 세 번째 장편 소설이다. 2008년 첫 장편 ‘템플턴의 괴물들’로 주목받은 뒤 2012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 ‘아르카디아’가 미국 주요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문학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이번 책도 출간 직후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무엇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피플’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읽은 2015년 최고의 책”으로 뽑아 화제가 됐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입을 빌려 ‘결혼’에 대해 새롭게 정의한다. “결혼이란 건 거짓말투성이야.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이라거나 “결혼은, 수학이었다. 더하기로 예측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결혼은 지수(指數)였다”고도 한다. 로토와 마틸드, 두 사람의 20여 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결혼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600페이지에 걸친 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만약 로토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보듬을 수 있을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두 사람이 서로의 가장 미천한 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결혼은,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까.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운명과 분노#로런 그로프#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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