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위주 구조조정 한계… 사모펀드 등 시장주도 활성화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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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도는 구조조정]<下> 시스템-체질 개선 시급


조선사들이 밀집한 울산과 전남에는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27일 한국은행이 내놓은 ‘지역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울산의 조선업 부문 고용보험 가입자 수는 지난해 10월 현재 5만23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16.6% 감소한 수준이다.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한 근로자도 지난해 10월 7200명을 넘어섰다. 전남 서남부 지역의 상황도 비슷하다. 상시 고용 인원이 같은 기간 18.9% 줄고 임금 체불액이 늘고 있다.

조선업 구조조정의 후폭풍이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대우조선해양 처리를 둘러싼 해법의 가닥을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다. 사채권자의 채무 조정 문제로 시간을 허비한 해운업 구조조정 때와 마찬가지로 돈을 빌려준 은행과 회사채를 사준 채권자의 손실 분담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책은행과 채권단 중심의 현행 구조조정 시스템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구조조정 속도를 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사채권자의 벽에 막힌 구조조정

KDB산업은행은 27일부터 대우조선 채권은행들을 대상으로 출자전환과 선수금환급보증(RG) 발급 등 ‘고통 분담’ 설득에 나섰다. 일부 은행이 RG 분담 비율에 대해 반발하고 있지만 ‘사채권자들도 손실 분담에 동의할 경우’라는 조건을 달아 동의할 가능성이 크다.

관건은 대우조선 회사채 3900억 원을 들고 있는 국민연금공단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대우조선 측으로부터 자구계획 실천 의지와 효과 등을 청취하고, 채무 조정안에 동의할지를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채권단에 산은이 추가 감자에 나서야 채무 조정에 동의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금융당국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증권가에선 사채권자들이 추가로 손실을 부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임정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채권은행(산은)의 도덕적 해이에서 대우조선의 유동성 위기가 발생했다”며 관리 부실을 투자자에게 떠넘겨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산은 등 대주주의 감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를 두고 국책은행과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의 자금 조달 방식이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으로 다변화되고 채무 구조도 해외 상거래 채권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등 기존 구조조정의 틀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올 2월에 파산선고를 받은 한진해운은 채권은행들이 들고 있는 협약채권의 비중이 30%에 불과했다. 은행들이 자율협약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면 그 돈이 해외 선주들의 용선료로 고스란히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대우조선도 수주산업 특성상 워크아웃에 돌입할 경우 계약이 대거 취소될 수 있었다.

○ 새로운 구조조정 틀도 진통

정부는 사채권자들도 구조조정에 참여시키고 손실 분담에 실패했을 때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건부 자율협약’ ‘P플랜’ 등 새로운 구조조정의 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연기금의 벽에 부딪히며 진통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역대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보면 노조 등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하다 보니 국책은행이 부실을 떠안고 정부가 다시 국책은행에 재원을 투입하며 구조조정이 지연됐다”고 말했다. 이어 “대우조선을 보면 (2000년 산은에 인수된 뒤) 회사가 처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이제야 2018년 이후 매각하겠다는 계획이 나왔다”고 꼬집었다. 실제 대우조선의 자구안 이행률은 34%로 현대중공업(57%), 삼성중공업(40%)보다 지지부진하다.

하지만 은행들에 구조조정을 맡기면 은행들이 충당금을 덜 쌓기 위해 구조조정을 미루거나 여신 회수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커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독립적 평가기관이 산정한 구조조정 채권의 공정가치를 매기게 하고, 은행이 산출한 가치와의 차액만큼을 충당금으로 쌓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은행들은 “지나친 개입”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옥석 가리기를 통한 시장 주도의 구조조정이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구두선에 그치고 있다. 2015년 정부는 부실채권(NPL) 관리 기능을 하던 연합자산관리(유암코)를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로 확대 개편했다. 하지만 유암코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매출 100억∼2000억 원대 중소·중견기업 대상의 구조조정에 손을 대는 정도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사모펀드(PEF)를 통한 선제적, 사전적 구조조정을 하게 만드는 일은 해묵은 과제다. 정부나 정치권이 구조조정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고 시장 원리에 따라 구조조정이 진행될 수 있도록 원칙을 세우고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동현 자본시장연구원장은 “정책금융기관의 덩치를 키워 기업 구조조정의 마중물 역할을 하게 하되 PEF가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정상화 작업을 진행하는 형태의 구조조정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강유현 yhkang@donga.com·이건혁·정임수 기자
#구조조정#사모펀드#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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