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부형권]최선은 최악에서 나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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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뉴욕 특파원
부형권 뉴욕 특파원
지난달 22일 밤 미국 캔자스 주 인구 13만 명의 작은 도시 올레이스의 한 술집. 해군 참전용사 출신 백인 남성 애덤 퓨린턴(51)이 “내 나라에서 꺼져라”라며 술집에 있던 인도인 2명에게 총을 난사했다. 정보기술(IT) 엔지니어 스리니바스 쿠치보틀라(32)가 숨졌고, 친구 알로크 마다사니(32)는 크게 다쳤다. 미 언론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백인 우월주의가 심해지는 가운데 발생한 비극”이라고 보도했다. 인도 정부와 국민들도 “미국의 부끄러운 인종차별 범죄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라”며 분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같은 달 28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도 언급한 이 사건은 미국의 어두운 그늘을 담고 있다. 그러나 뉴스의 뒷면에 미국의 빛과 저력이 숨어 있다.

총기 난사 현장에 있던 백인 남성 이언 그릴럿(24)은 생면부지의 인도인들을 구하려고 몸을 던졌고 오른팔과 가슴에 총격을 당했다. 달아난 범인 퓨린턴은 다른 술집으로 가서 “방금 중동(아랍) 사람 2명을 죽이고 왔다”고 무용담을 떠들다가 술집 바텐더의 조용한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스탠퍼드대의 한 인도인 연구원은 신문 기고를 통해 “2명의 용감한 시민(그릴럿과 익명의 바텐더) 덕분에 살인범이 검거됐다. 최악의 인종주의 범죄에서 최고의 시민의식을 확인했다”고 감사를 표했다. 인도 정부는 ‘영웅 그릴럿’을 정식 초청했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트럼프 반대 대 트럼프 지지, 진보 대 보수로 나라가 두 동강 난 것 같다. 그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상 내전(內戰) 상태’란 말도 나온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캔자스 총격 사건처럼 뉴스 뒷면의 시민의식과 저력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체감한다.

“여러분, 누가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우리 모두(미국인)는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 사람과 손을 잡아 보세요.”

지난달 뉴욕 맨해튼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서 아마추어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사회자가 이렇게 외쳤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기자도 오른편의 흑인 중년 여성, 왼편의 파키스탄 출신 젊은 남성과 ‘어색하게’ 손을 잡고 사회자 지시대로 천장을 향해 들어 올렸다. 기분이 묘했다. ‘정치가 갈가리 찢어놔도 시민들이 도로 붙여놓는구나.’

2001년 9·11테러는 3000명이 넘는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마저도 위대한 저력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표로 승화시켰다.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 항만청 경찰, 뉴욕경찰(NYPD)은 생존자 구조를 위해 무너지는 건물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런 순직자만 400명이 넘는다. 당시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강해질 것입니다. 뉴욕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를 외치며 최고의 리더십을 보였다. 지지율이 79%까지 치솟았고, 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9년 뒤(2026년) 건국 250주년이 된다. 그때 이 나라가 이뤄냈을 경이로운 것들을 상상해 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한민국은 반만년 역사 위에 서 있는 나라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도약을 해 온 저력의 두께는 250년 역사의 미국과 비할 바가 아니다. 미국은 9·11테러가 ‘최초의 본토 공격’이라며 경악했지만 대한민국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국난(國難)들을 극복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정말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 최악에서 최선을 만드는 저력의 반만년 역사를 이어가는 건 온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
#트럼프#미국 9·11테러#총기 난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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