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영웅전설’이 찾아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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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그래픽노블 ‘사가’

그래픽노블 ‘사가’의 주인공인 알라나와 마르코, 그리고 딸 헤이즐은 가족은 물론이고 각자의 조국을 뒤로한 채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시공사 제공
그래픽노블 ‘사가’의 주인공인 알라나와 마르코, 그리고 딸 헤이즐은 가족은 물론이고 각자의 조국을 뒤로한 채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시공사 제공
“스타워즈가 왕좌의 게임(미국 HBO 드라마)을 만났다.”(MTV)

미국도 참 과하다. 괜찮다 싶으면 칭찬이 블록버스터다. 좀 재밌기로서니 SF(공상과학)와 판타지 최고봉을 다 갖다 붙이다니. 이게 끝도 아니다. “반지의 제왕 우주 버전.”(AICN) “SF로 탄생한 로미오와 줄리엣.”(iFanboy) 도대체 뭐기에. 모두 올해 초 국내에 1, 2권이 출간된 그래픽노블 ‘사가(Saga·시공사)’를 두고 나온 얘기다.

살짝 배알도 꼴린다. 뭐 대단하다고 이리 난리냐. 몇 장 넘기다 보니 입이 삐죽거려진다. ‘젠장’ 시샘이 불끈 솟구쳤다. 이것들, 또 물건 하나 내놓았구나. 차마 저만한 호평까진 아니더라도. 그래, 끝내주는 ‘영웅전설(saga)’이 다시 한번 우리 곁을 찾아왔다.

머나먼 우주 어딘가에 ‘랜드폴’과 ‘리스’란 별이 있다. 천사와 악마만큼 생김새가 다른 두 별 종족은 철천지원수. 서로 증오하며 끝없이 싸워왔다. 아, 근데 이를 어쩌나. 군인과 포로로 만난 마르코와 알라나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어렵사리 함께 도망쳤지만 양국 정부의 끈질긴 추격을 받게 되는데…. 딸 ‘헤이즐’까지 출산한 두 사람의 여정은 어디까지 다다를까.

줄거리만 따지면 ‘사가’는 의외로 심플하다. 허나 빼곡히 속을 채운 설정과 캐릭터가 거침없다. 뿔이나 날개 달린 모양새는 딱히 놀랍지도 않다. ‘스파이더우먼’ 살인청부업자는 진짜 다리만 8개인 거미 여인.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랜드폴 왕족은 몸은 사람이나 머리가 TV(혹은 컴퓨터)다. 광선총과 유령, 마법과 최첨단이 뒤섞여 우주를 수놓는다. 잠깐 갓길로 새자면, 이토록 광활한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인종 성별 같은 ‘선긋기’는 참 부질없다.

현지에선 2012년 선보인 ‘사가’는 출간 전부터 만화 팬들의 기대가 무척 컸다. 글쓴이가 다름 아닌 브라이언 K 본이기 때문이었다. 국내엔 배우 김윤진이 출연해 화제였던 드라마 ‘로스트’ 시즌 3∼5의 각본가인 그는 2002년 만화 ‘Y: 더 라스트 맨’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어느 날 남성 1명과 원숭이 1마리만 빼고 모든 남성과 수컷이 멸종한 세상을 다룬 이 작품은 소설가 스티븐 킹이 최고의 그래픽노블로 꼽기도 했다.

‘사가’는 평단의 상찬만큼 상복도 엄청났다. ‘만화의 아카데미상’ 아이스너상의 최고상 격인 ‘베스트 연재 만화상’을 2013∼2015년 3년 연속 받았다. 이는 1991∼1993년 ‘샌드맨’에 이은 역대 두 번째. 이 밖에 ‘SF계의 노벨상’ 휴고상 그래픽노블 부문상(2013년)도 거머쥐었다.

물론 이 작품은 워낙 강해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듯하다. 욕설과 외설이 차고 넘친다. 미국에서도 2014년 전미도서관협회(ALA)는 “가족주의적 가치관에 반하며 성적으로 문란해 (청소년이나 노년) 특정 연령에 맞지 않는다”며 ‘가장 논란이 큰 문제작 10’ 리스트에 올렸다. 실제로도 어린이나 점잖은 분들이 보기엔 다소 상스럽긴 하다.

허나 품위만 따지고 들기엔 ‘사가’는 너무 매력적이다. 생각해보라. 걸작인 건 분명하지만 루크 스카이워커나 프로도 배긴스가 지금 나왔다면 그런 인기가 가당키나 했을까. 21세기엔 줄리엣도 걸쭉한 입담 정도는 갖춰 줘야지. 어차피 볼 사람만 볼 만화. 시원하게 질러주고 통쾌하게 뻗어나가길. 그놈의 우주는 넓디넓으니까. ★★★★☆(다섯 개 만점)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래픽노블 사가#헤이즐#알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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