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12년간 외국인 근로자 진료… “치과의사로 사회적 책임 다해야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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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정성국 광주이주민건강센터장

19일 광주 광산구 광주이주민건강센터에서 정성국 센터장이 외국인 근로자 치과 진료를 마친 뒤 환하게 웃고있다. 그는 12년 동안 센터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9일 광주 광산구 광주이주민건강센터에서 정성국 센터장이 외국인 근로자 치과 진료를 마친 뒤 환하게 웃고있다. 그는 12년 동안 센터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9일 오후 1시 광주 광산구 우산생활건강지원센터. 3층에 자리한 광주이주민건강센터 상담창구 앞에서 라이브러 항 씨(29·네팔)가 어설픈 한국말로 “이와 허리가 아파요”라고 호소했다. 창구 앞 30여 ㎡ 공간에는 외국인 근로자 등 40여 명이 비좁게 앉아 접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이주민건강센터(옛 광주외국인노동자건강센터)는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이다. 의학과와 한의학과 치과 진료상담실 등을 갖춘 이곳에는 매주 일요일 전국에서 찾아온 외국인들로 북적인다. 진료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되지만 치료의 손길이 절실한 외국인들은 2, 3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린다. 광주 하남산단에서 일하는 항 씨는 “센터에서 세 차례 진료를 받아 허리가 많이 좋아졌다”며 고마워했다.

○ 의료 사각지대에서 펼치는 인술


광주이주민건강센터장을 맡고 있는 치과의사 정성국 씨(49)는 이날 러시아에서 온 텐 알렉산드르 씨(53)를 치료했다. 치과 치료를 받은 알렉산드르 씨는 통증이 많이 가신 듯 밝게 웃어 보였다.

정 센터장은 치과의사인 아내 김영옥 씨(48)와 함께 광산구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6월 26일 센터가 문을 열 때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12년째 참여하고 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센터 창립 멤버가 됐다. 당시 광주기독병원 의사들은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각계에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돕는 봉사활동을 제안했다. 이에 광주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주전남한의사협회 등이 동참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광주전남 사무처장을 맡고 있던 그는 센터 설립에 적극 참여했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외국인 근로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많이 접했다.

60대 베트남 남성은 지난해 여름 말기 암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고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 치료를 미룬 채 일을 계속했다. 이 남성은 센터로 진료를 받으러 올 때 일하던 농장에서 키우던 호박과 상추 등을 검정 비닐봉투에 담아 오기도 했다. 진료에 대한 작은 고마움의 표시였다. 진통제로 버티던 남성은 지난해 겨울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고국으로 돌아갔다. 정 센터장은 센터를 찾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광산구 송정리에서 태어난 정 센터장은 송정동초교와 정광중, 진흥고를 졸업한 뒤 1988년 전남대 치과대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다닐 때 아내 김 씨와 함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정 센터장은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장애인시설을 찾았다. 그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선행은 2003년 장애인 시설에서 무료 진료를 할 때 알려졌다. 센터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윤현식 화순현대치과 원장(46)은 “광주 남구의 한 장애인시설에 무료 진료를 함께 갔는데 지적장애인 한 명이 정 선배를 보고 ‘10년 만에 만나 반갑다. 꼭 오겠다는 약속을 지켜줘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2000년부터 매주 광산구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쌍용자동차 근로자들을 위한 진료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국내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어서 한국 경제에 중요한 동력이 되는 등 이주민 역할이 커지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은 치과 의사로서 최소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 580회 진료 이끈 자원봉사자들의 힘

이날 광주이주민건강센터의 진료는 580회째였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을 제외하고 매주 일요일 오후 4시간 진료가 중단된 적은 없었다. 센터가 매주 활짝 문을 열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맞는다는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서울 경기 충청지역 외국인 근로자들까지 ‘원정 진료’를 받으러 온다. 센터가 그동안 진료한 외국인 근로자는 2만7000여 명, 투약 건수는 4만6000건이 넘는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을 가족처럼 포근하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센터를 찾은 사람들의 90% 이상은 등록증이 있는 합법 외국인 근로자들이지만 일부는 농촌의 하우스, 축사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라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근무시간에 병원을 가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혼이주여성이지만 남편이 동의하지 않아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광주지역 외국인 2만6535명(2015년 기준) 가운데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원은 1만6594명(62.5%)으로 집계됐다.

조영은 센터 간사(29·여)는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대부분 아프면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며 “센터를 찾는 외국인 근로자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센터는 창립 당시 광산구 산정동 60㎡ 상가를 후원금으로 빌려 사용했다. 이후 광산구 우산동 상가로 옮겼다가 현재는 보건지소격인 우산생활건강지원센터에 둥지를 틀었다. 센터 운영비는 1억2000만 원 정도 든다. 센터 사무실 임차료와 의료장비 수리비, 긴급환자 지원 등에 쓴다.

센터는 광주시나 광산구에서 일부 지원을 받았지만 대부분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후원금 상당 금액은 자원봉사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은 의사와 한의사, 치과의사, 약사, 간호사 등 의료인은 물론 치의학전문대학원과 간호학과 치기공과 등 예비 의료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광주지역 중·고교생들도 매주 봉사활동을 하러 온다.

일부 외국인 근로자가 진료 도중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광주시와 전남대병원 등 51개 기관을 통해 도움을 주고 있다. 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외국인 근로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한국에 남기도 하지만 이들은 센터와 자원봉사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정 센터장은 “센터가 12년 동안 쉬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은 1만200여 명의 자원봉사자 덕분”이라며 “자원봉사는 센터의 가장 큰 버팀목이자 저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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