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수송보국의 꿈’ 남긴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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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파산 선고’ 예정 한진해운 르포

조중훈 창업주가 세운 대진해운은 1977년 한진해운으로 이름을 바꾼 뒤 한때 세계 7위의 해운사로 성장했다. 그래픽 속 사진은 한진해운의 전신인 대진해운이 1968년 한일 항로에 투입한 장항호. 한진해운 제공
조중훈 창업주가 세운 대진해운은 1977년 한진해운으로 이름을 바꾼 뒤 한때 세계 7위의 해운사로 성장했다. 그래픽 속 사진은 한진해운의 전신인 대진해운이 1968년 한일 항로에 투입한 장항호. 한진해운 제공

# 장면 1 13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부산 신항만 3부두. 한쪽에 한진해운 마크를 단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었지만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트럭은 없었다. 1000개가 넘게 쌓여 있는 한진해운 컨테이너는 모두 속이 빈 채였다. 신항만 관계자는 “한진해운 소유이거나 빌린 컨테이너다. 비어 있는 채로 장기 보관 중이고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 장면 2 10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카페에서 만난 이모 차장은 명함을 주려다 망설였다. 한진해운의 이름과 마크가 선명한 명함. 앞·뒷면에 한글과 영어로 이름과 직함이 적혀 있는 명함이다. 해외에서도 당당하게 내밀던 ‘신용장’이다. 하지만 이 차장은 이제 명함에 적힌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17년 청춘을 싣고 떠나가는 회사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차장을 비롯해 한진해운에 남은 직원들은 회사 자산을 청산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지사의 사옥과 가압류 재산, 계좌 등을 정리하는 일이 포함된다.

‘파산’을 앞둔 한진해운의 현재 모습이다. 국내 1위 해운사였던 한진해운은 지난해 9월부터 법정관리 중이다. 지난해 말에는 여의도 시대를 끝내고 염창동으로 이사했다. 20층 건물 절반을 차지했던 회사가 양화교 인근 빌딩 한 층을 빌렸다. 육상·해상 1300명 넘던 직원 중 50여 명이 남았다. 남은 재산을 정리하는 청산 작업이 이들의 주 업무다. 새 사무실 입구엔 대양(大洋)을 누비던 7500TEU급(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 컨테이너선 모형이 놓여 있다.

○ 치킨게임? 냉혹한 시장 개편 중 도태

“불치병 진단을 받은 날이었죠. 직전까지도 직원 대부분이 상상을 못했어요.”

이 차장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난해 9월 1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 직후 한진해운 내부에는 ‘회생 태스크포스(TF)팀’이 마련됐지만 회사는 살아나지 못했다. 법정관리 시작 직후 부산 신항만에는 화주들의 문의와 항의 전화, 그리고 방문이 이어졌다. 화주 각자에게는 시간 맞춰 보내야 하는 절박한 화물들이었다. 주말에도 자정까지 일하며 배에서 컨테이너를 내리고 화주들이 화물을 찾아가는 일은 지난해 말에야 거의 마무리됐다. 1000개 이상의 빈 컨테이너가 이제 그 흔적으로 남았다.

한진해운의 추락 배경에는 세계 해운업의 거대한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대량생산으로 비용을 낮추는 ‘규모의 경제’가 가장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는 영역이 바로 해운업이다. 이 차장은 “기본적인 신용을 확보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더 싼값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의 운임 경쟁만이 남는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은 2008년부터 극동구주항로운임동맹(FEFC)이 정한 공통 운임률에 의해 운영돼 온 해운업계의 운임 담합 시스템을 폐지했다. 제한 없는 운임 경쟁 속에서 초대형 해운사끼리도 합종연횡하며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바닥 수준의 운임 경쟁이 이어지는 상황을 누군가는 ‘치킨게임’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세계 해운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중이고 한진해운은 그 과정에서 패자가 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 예상 못한 불황에 경영 실패까지


한진해운은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1977년 세운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다. ‘수송보국’을 내세운 한진해운의 역사는 곧 한국 해운 산업의 역사였다. 거대한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로에 매주 배를 띄우려면 한 노선 운영에도 여러 척의 배가 필요하다. 거듭 국내외 선사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운 한진해운은 지난해 선복량(선박 적재 공간) 기준 세계 7위의 해운사였다.

이 차장이 입사한 2000년대 이후 해운은 호황을 누렸다. 중국 경기 활성화 등으로 2000년대 중반 세계 해운 물동량이 급증했다. 그는 “정신없이 바빴지만 회사가 잘나가니 일할 맛이 나던 때”라고 했다. 배 숫자가 늘고, 배 크기가 커지는 것이 한진해운 명함을 들고 다니는 이 차장의 자부심이었다. 회사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보며 그는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꿈을 키웠다.

상황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돌변했다. 해운업이 급격히 침체됐고 한진해운은 위기에 빠졌다. 2006년 조 창업주의 셋째 아들 조수호 회장이 작고하고 경영 경험이 없는 부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섰던 때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배가 없어 화물을 나르지 못하던 호황 때의 전망을 믿고 10년 이상 장기 계약으로 빌렸던 배가 화근이 됐다.

2014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경영권을 넘겨받으며 침몰하는 회사 건지기에 나섰다. 대한항공 등 그룹 주력 계열사가 1조 원 이상의 자금을 수혈했다. 하지만 불황 속 항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진해운은 지난해 4월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갔다. 자금 지원이 중단되자 8월 31일 마침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은 한진해운을 청산하는 것이 남겨두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13일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한진해운 회생 절차 폐지 이후 채권단의 이의 제기는 아직 없다. 17일 오전 파산 절차 개시 결정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 ‘모항’엔 텅 빈 컨테이너만

13일 한진해운의 빈 컨테이너가 ‘좌초’돼 있는 자리 건너편의 신항만 3부두 선석(船席)은 텅 빈 상태였다. 한진해운은 이 3부두 터미널 물동량의 60%를 차지했다. 한진해운의 모항(母港) 같은 곳이다.

2만 TEU급 컨테이너선 3척을 댈 수 있는 거대한 터미널. 하지만 배에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12개의 STS(Ship To Shore) 크레인은 모두 팔을 하늘로 든 채 멈춰 있었다. 컨테이너를 선석으로 옮기는 100대가량의 야드 트랙터는 고스란히 한쪽에 주차돼 있었다. 신항만 관계자는 “4월 이후 부산 신항만을 이용하는 해운사들의 물량이 전체적으로 조정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3면이 바다라지만 실제로는 섬과 다름없는 한국의 수출입 물동량은 99.7%가 바다를 통한다. 한때 한진해운이 모항으로 삼았던 이곳에 지금은 코스코(중국), K-Line(일본) 같은 이웃 국적 해운사 배가 눈에 띈다.

이 차장은 “나중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나라가 세계 7위 선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사람들이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창원=김도형 dodo@donga.com·정민지 기자
#한진해운#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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