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그리스 청동투구와 손기정 마라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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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투구.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투구.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최근 독일 베를린과 서울에 손기정의 동상이 세워졌다.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 주변 마라톤 코스에 조성된 동상은 손기정이 역주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체육공원에 세운 동상은 손기정의 마라톤 시상식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 동상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가슴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있다는 점. 그런데 손기정은 두 손으로 투구를 들고 있다. 마라톤 우승자에게 웬 투구일까.

 20세기 전반기엔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 유물을 부상으로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마라톤이 그리스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에선 그리스의 한 신문사가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를 부상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아마추어 선수에겐 메달 이외에 어떠한 부상도 줄 수 없다”며 손기정에게 투구를 전달하지 않았다.

 손기정은 이런 사실조차 모른 채 귀국했다. 일제는 이를 알려주지도 않았고 투구를 달라고 건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970년대 손기정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투구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투구가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때부터 반환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반환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진품은 돌려줄 수 없고 복제품 반환은 가능하다고 했다.

 1986년 드디어 청동투구는 손기정의 품에 돌아왔다. 올림픽에서 우승한 지 50년 만이었다. 그 후 투구를 보관해 오던 손기정은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투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에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제작된 이 청동투구는 1875년 독일 고고학 팀에 의해 올림피아 제우스신전에서 발굴되었다. 투구는 전체적으로 당당하다. 이마 부분에서 아래로 잘록하게 들어갔다가 목 부분에서 나팔처럼 쫙 펼쳐지는 모양새가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이렇게 완벽한 원형을 유지한 청동투구는 그리스에도 드물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그 낭보를 알리기 위해 먼 길을 숨차게 달려온 그리스 병사. 그 병사도 코린트 청동투구를 쓰고 전투에 참가했던 것일까. 그를 기리기 위해 시작된 마라톤. 식민지 조국을 위해 달리고 또 달렸던 손기정에게 이 청동투구는 참 잘 어울리는 부상이었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
#손기정#그리스 청동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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