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이마 맞댄 처마·살가운 달빛… 시인이 잡아둔 북촌의 풍경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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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신달자 지음/156쪽·9000원·민음사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서늘함’에서)

 시인 신달자 씨(73)가 북촌에 자리 잡은 지 2년째다. 북촌로 8길 26, 열 평짜리 작은 한옥이 시인의 거처다. 겨우 다리를 펼 만한 ‘발 닿고 머리 닿는/봉숭아 씨만 한 방//한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손 쪼이며/오후 햇살과 말동무 하려고’ 시인은 거처를 잡았다. 이사 온 첫날 ‘북촌’이라는 시집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시인은 새 노트를 펴고 ‘북촌’이라고 썼다.

  ‘북촌’은 그렇게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천천히 걸어가는데/계동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시인은 달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듣는다. ‘달이 슬그머니 팔을 걸어오면서/이 밤을 끌고 지구 끝까지 가자고 한다’(‘계동의 달’) 삼청동 오르막길에선 ‘나뭇잎 다 지고 뼈로 선 나무에 왜 불꽃이 보이는지’(‘불꽃’)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시인의 눈엔 보인다. 북촌 곳곳을 걷다 보면 ‘계동 원서동 가회동 삼청동/정독도서관 헌법재판소가 감사원이/국립미술관이 삼청공원이 창덕궁이 민속박물관이’ 다 자기 것 같다고, 열 평 한옥만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북촌이 다 자기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한옥 집 처마들이 저마다 닭 벼슬 부딪치듯 사랑싸움을 하는 것 같은 북촌, 따뜻한 햇살이 한옥 뒷마당에 뒹군다(‘북촌 가을’). 시인은 ‘느리게 느리게 북촌을 걸으며 되돌아서서’ 지금껏 걸어온 인생을 본다. 지난 시간을 어루만지면서 북촌에서 그는 ‘노후의 계단을/시큼하게 본다’(‘우연이 아니다’에서).

 북촌에 사는 동안 내내 아팠다는 시인. 그럼에도 그는 북촌을 써야 한다는 의욕으로 통증을 견뎠다고 했다. “이 시집은 북촌의 손가락 하나쯤의 표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 북촌 사랑에 대한 작은 미소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이 시집을 내는 용기를 가졌다”고 시인은 시집의 의미를 겸손하게 부여했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북촌#신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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