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 역사적 ‘원폭 화해’… 5분 거리 한인위령비의 ‘哭聲’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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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히로시마 방문]균형 깨진 美의 ‘한일 과거사 외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27일 일본 히로시마(廣島) 평화기념공원에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지 않았다.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 처음 일본 피폭 현장을 방문하는 만큼 한국과 균형을 맞춰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동안 과거사 문제만큼은 한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보였던 미국의 평형추가 일본 쪽으로 쏠리는 순간이었다.

한국 정부는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직전까지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참배를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여러 형식의 협의를 통해 미국에 우리 의견을 전달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악관은 방문 당일까지도 “위령비 참배 여부는 전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 사항”이라며 확답을 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일본은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머무는 시간이 1시간도 안 돼 동선상으로 무리”라며 위령비 참배 불가론을 주장해 왔다. 오바마 대통령이 헌화한 곳에서 150m가량 떨러진 위령비까지는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미일 당국은 당초 “오바마 대통령이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을 추도할 것이고 여기에는 한국인 희생자들도 포함된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이날 오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마친 뒤 자신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과 관련해 “희생된 모든 사람을 추도한다”고 밝혔다.

한일 사이에 역사적 앙금이 남아 있는 미해결 상태에서 이뤄진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일본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 과거사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을 오히려 ‘피폭 피해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인 위령비 방문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4년 핵안보정상회의(네덜란드 헤이그) 때 한미일 3국 정상회의를 제안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처음 한자리에 마주 앉도록 했다. 이때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국장급 협의가 약속됐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며 한국과 재논의 자체를 반대하던 일본의 태도를 바꾼 게 미국이다. 하지만 지난해 종전 60주년 기념 아베 담화 발표에 이어 한일 위안부 합의(12월 28일)가 채택되면서 미국은 “과거사는 해결됐다. 이제 미래를 지향하자”는 목소리를 공공연히 내고 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조차 26일 제주포럼에서 “위안부 합의의 온전한 이행을 위해서는 총리의 사죄 편지가 필요하다”며 미해결 상태를 지적했지만 미국은 ‘이만하면 됐다’는 태도다. 임기 마지막 해인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베트남에 이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미국 중심의 과거사 화해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등 미국 유력 대선주자 역시 집권하면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역사 문제를 다룰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일본에 과거사 책임을 압박하며 약자인 한국을 편들어 균형을 맞추던 태도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앞서 27일 오전 히로시마평화공원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는 전날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했다.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73) 등 10명은 위령비에 헌화한 뒤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이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일본의 피해만 부각하고 식민지 억압과 피폭이라는 이중의 희생을 당한 한국인 피폭자들의 존재는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고 강조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히로시마=서영아 특파원
#오바마#위령비#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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