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손수지]화나는 세상, 화내지 않고 살아갈 용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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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지 주부·전 홍보대행사 근무
손수지 주부·전 홍보대행사 근무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주무시다 일어나서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히는 일이 잦았다. 한겨울 바람이 쌩쌩 부는 창가에 앉아 한참이나 가슴을 두드린 후에야 다시 잠을 청하시곤 했다. 날씨도 추운데 왜 창문을 열어두느냐고 내가 투정하면 속에서 열불이 나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 마음속에 열불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여러 가지였다.

돌아가신 지 몇십 년이 지난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청상과부를 만들어버린 할아버지를 향한 원망, 말썽을 부리는 자식을 향한 걱정….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우울과 분노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누르고 또 눌러 화병이 생겼던 것 같다.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세대이니 할머니는 마음속 응어리를 제대로 꺼내 보지도 못한 채 한평생을 보내셨다.

할머니와 반대로 화를 숨기지 않고, 마음껏 표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년기를 보낸 동네에는 술만 먹으면 자신의 가족에게 해코지하는 이웃이 살았다. 말리는 사람에게도 행패를 부려 그 어른이 술을 많이 먹고 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집 가족은 그분이 술이 깰 때까지 골목에 나와 기다리곤 했다. 무슨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웃 어른은 주기적으로 분노를 표현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질러댔다.

화는 여러 형태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할머니처럼 쌓이고 쌓여 바위처럼 단단해진 화 덩어리를 가진 안타까운 이들이 있다. 이웃 사람처럼 자신의 분노를 불티처럼 날려 사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폭탄 같은 분노를 남들 모르게 품고 있다 갑자기 큰 사건을 터뜨려 온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있다.

내가 가진 분노나 미움의 모습은 제대로 볼 기회가 적었다. 어렸을 때는 크게 화를 낼 일이 없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던 학창 시절에는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웠다. 학업과 입시는 힘든 일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즐거운 시간으로 이겨낼 만했던 것 같다. 화가 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쌓아두거나 주변 사람에게 화풀이할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남을 향한 분노나 미움이 내 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느낀 것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하다 마찰이라도 생기면 마음속에 화산이 폭발하는 듯 분노가 치밀었다. 선배든 후배든 갑을 관계로 만난 사람이든 내 의견을 다 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생각이 다르다 보니 가끔 다툼도 생겼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며칠을 끙끙 앓은 적도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화를 쌓아두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여과 없이 드러내거나 분노의 파편을 튀기며, 상처를 주는 못된 행동도 보였다.

종일 인터넷을 끼고 살 수 있는 환경이다 보니 나와 먼 이야기에 분노를 터뜨리는 일도 많아졌다. 여러 이슈에 대해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을 여과 없이 접할 수 있다 보니 실체도 없는 대상에 화가 나는 일도 종종 생긴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데도 온라인에서 격한 다툼이 일어날 때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내 속에 치미는 화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화를 제때 풀어내기 위해 만든 여러 취미가 이제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불가능한 일을 해 보이겠다는 오기로 가능하게 만들어 능력의 한계치를 좀 더 확장하기도 했다. 집단의 분노 역시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잊혀지거나 억지로 묻어버린 사회 문제가 집단의 요구로 해결되는 일을 여러 번 보았다. 분노가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 화를 무조건 참고 가만히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무엇 하나 경쟁이 아닌 것이 없다. 남이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쓰러지는 형국이니 모두의 마음속 분노가 들끓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렵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불의에는 용기를 내 함께 힘을 합치면 더 좋겠다. 좁아진 이해심의 방의 크기를 키워 배려와 약자를 존중하는 일, 나부터 시작해봐야 할 것 같다.

손수지 주부·전 홍보대행사 근무
#열불#화병#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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