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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재건축으로 사라지는 마음의 고향, 기록으로 남겨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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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재건축으로 사라지는 마음의 고향, 기록으로 남겨둬야죠”

정동연 기자 입력 2016-05-21 03:00수정 2016-05-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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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키드’ 2030세대의 추억여행
2014년 10월 둔촌주공아파트의 상징이었던 ‘기린놀이터’가 철거되기 하루 전 이를 기념하는 주민들이 모여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이인규 씨 제공
“여기가 엄마 아빠가 어릴 때 놀던 추억의 장소야.”

얼마 전 최현주 씨(39·여)는 20개월 된 아들과 함께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를 찾았다. 재건축을 앞두고 조만간 놀이터가 먼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다. 최 씨는 1980년부터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동창인 남편도 최 씨와 함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히 둔촌주공아파트 3단지 앞 놀이터는 1980, 90년대 둔촌아파트 어린이들의 ‘아지트’와도 같았다. 어린이들은 이곳을 ‘기린놀이터’로 불렀다. 놀이터 한가운데 기린 모양 미끄럼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최신식’ 미끄럼틀이었다. 최 씨는 남편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어릴 때 미끄럼틀 꼭대기에 서면 너무 높아서 무서웠지만 친구들과 경쟁하듯 내려올 때는 겁나지 않는 척했다”며 “남편과 함께 공유하는 이런 추억들을 아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나중에 아이가 크면 이곳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추억을 얘기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진호 씨(29) 역시 아파트가 고향인 ‘아파트 키드’다. 2013년 동네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이 씨는 어릴 적 친구들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성인이 돼 다시 만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 씨는 “참 좋은 동네에 살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과 ‘와리가리’ ‘경찰과 도둑’ 같은 걸 하며 놀았고, 나이를 먹고 나서는 몰래 담배 한 대 피우고 술잔도 기울였던 곳”이라며 아파트 놀이터의 추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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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나이가 먹고 동심이 사라져 갈 때쯤 재건축 얘기가 나왔고 가격이 오르자 집을 팔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면서 “친구들도 운명을 다해가는 아파트의 재건축을 받아들이면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파트가 ‘고향’인 ‘아파트 키드’들은 사라져 가는 고향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둔촌주공아파트를 찍은 사진을 모아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 사진전에 참여했던 이인규 씨(34·여)는 “당시 교수진으로 구성됐던 자문위원들이 아파트의 삭막함이나 부동산 투기 등 부정적인 인식이 많아 전시 자체를 반대했다”며 “기성세대가 가진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의외로 부정적이라는 걸 느꼈다”고 덧붙였다. 당시 이 씨는 자문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민 대부분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아파트가 사실상 ‘고향’인 점을 강조하면서 아파트의 긍정적인 면을 얘기해 전시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79년 지어진 6000여 채 규모의 둔촌주공아파트에는 친구와 이웃 등 이 씨의 소중함이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씨는 어린 시절 추억과 감성을 담은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곧 재건축이 될 아파트의 추억을 기록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게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즐겁고 푸근한 고향이니까요.”

이 씨는 자비를 쏟아 부어 꼬박 6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2013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출판했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책을 만든다는 소식에 여러 사연이 모였다. 대부분 어린 시절을 아파트에서 보낸 ‘아파트 키드’들이 보냈다.

“둔촌주공아파트에는 20∼30년씩 살았던 사람들이 많아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추억을 가진 ‘아파트 키드’들의 관심이 많았죠. 3000명의 팔로어는 추억을 담은 장문의 글과 옛 아파트 사진을 올리며 아파트의 추억을 공유했어요. 힘들 때마다 고향 같은 둔촌아파트를 찾아 힘을 얻는다는 고백부터 어릴 때 살던 아파트 사진 좀 찍어서 올려 달라는 외국의 젊은이까지 사연도 각양각색이었죠.”

이 씨는 2014년 철거된 놀이터에서 작은 이벤트를 열었다. 철거를 앞두고 있던 기린놀이터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불꽃놀이를 한 것. “높이 5m의 기린 모양 미끄럼틀은 둔촌주공아파트의 상징인데 안전 문제로 철거하게 됐어요. 아쉬운 마음에 SNS에 불꽃놀이로 작별인사를 하자고 글을 올렸는데 그날 밤 100명이 넘게 모였어요. 서로서로 불꽃과 불꽃을 잇고 손편지를 적으며 기린놀이터를 보내는 아쉬움을 나눴죠.”

이 씨는 최근 또 다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안녕, 둔촌×가정방문’이라는 제목의 기획을 통해 영상작가 ‘라야’(필명)와 함께 신청자의 집을 직접 찾아가 사진에 담아내고 집에 얽힌 사연도 들어볼 계획이다. 프로젝트 중인 이 씨는 “신청자들의 사연이 하나하나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 신기했다”며 “특히 이곳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적어주신 한 어머님의 글을 읽다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봐준 앞마당 정원’이라는 문구에서 울컥했다”고 말했다. 현재 책은 3호까지 출판됐으며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때까지 계속 발행할 계획이다.

“책의 제목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안녕’은 ‘굿바이’인 동시에 ‘하이(Hi)’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요. 재건축이 단절이 아니라 추억의 이어짐이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입니다.” 추억을 기록해 가는 이 씨의 목소리에 설렘이 묻어났다.

‘8자 수영장’과 ‘과천극장’을 아시나요?

2014년 여름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이인규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주민들이 홍보 전단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인규 씨 제공
1980년대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아파트 5단지 안에는 8자 모양 수영장이 있었다. 모양 때문에 ‘8자 수영장’으로 불린 이 수영장의 이름은 당시 국민적 관심사였던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려는 의미의 이름이라고 주민들은 추측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 단지 안에 수영장 시설이 있다는 건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실제로 여름이면 개장해 주민들이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한 초등학생이 수영장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8자 수영장’은 더이상 문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이 자리에 주차장이 들어서 당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다. 잠실주공 5단지에서도 이런 추억들을 기록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기 과천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청년들이 다 함께 공유하는 것이 있다. 1990년대 초중학생들이 영화 ‘토이스토리’ ‘고질라’ ‘타이타닉’을 보러 몰려갔던 과천극장이다. 과천시 중앙동에 있었던 이 영화관은 2000년대 후반 문을 닫았다. 이곳에 얽혀 있던 청년들의 추억도 함께 사라졌다.

사라져 가는 아파트를 기록해 남겨두는 일은 수도권의 재건축 예정 아파트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수도권 최초 계획도시로 1980년대 초반 아파트가 대거 들어선 과천시에도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덧 30대가 된 이곳의 ‘아파트 키드’들 역시 추억을 기록하는 일을 조금씩 진행하고 있다. 2014년부터 몇몇 젊은이가 모여 SNS에 ‘과천, 청년들의 수다’ 페이지를 만들어 옛 사진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4000명이 넘는 청년이 크고 작은 사연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14년 결혼해 계속 과천에 살고 있는 이한진 씨(32)는 “과천의 주공아파트들은 전세로 거주하는 분들도 오래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최근 재건축 얘기가 나온 뒤 이주가 갑자기 결정되면서 모든 게 서둘러 진행되는 느낌이라 섭섭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와 달리 과천의 추억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파트 한 개 단지가 아닌 여러 단지의 주민들이 공유했던 옛 추억을 되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지난해 12월 지역구 국회의원인 송호창 의원과 함께 과천 청년들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이들은 추억이 담긴 사진을 모아 책을 만드는 것을 포함해 과천 지역 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계속해서 이어 나갈 예정이다.

조만간 사라질 아파트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고향’을 얘기했다. 이인규 씨는 “아파트를 차가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성냥갑’이나 부동산 투기를 통한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며 “이곳에서 고향이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향을 구성하는 건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 그리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이라는 의미였다.

정동연 기자 call@donga.com
#둔촌주공아파트#기린놀이터#아파트 키드#8자 수영장#과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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