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처럼 잊고싶은 사건”… 문혁 50년, 침묵의 中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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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권력집중, 문혁 회귀 논란… 서방 언론 “마오 이미지 연상시켜”
“문혁, 좌경화 잘못으로 생긴 동란”… 런민일보, 시진핑 1월 발언 공개
‘개인 우상화’ 논란 진화 나서

16일은 중국 현대사에 10년간 권력 투쟁 광풍을 몰아치게 한 ‘문화대혁명’(문혁·1966∼1976년)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문혁 50주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식 행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최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개인숭배 움직임까지 나타나면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끌었던 ‘문혁시대 회귀’ 논란이 일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50주년을 맞은 문혁에 대해 “1989년 6월 4일 톈안먼(天安門) 사태처럼 중국 공산당이 국민에게 ‘기억상실증’을 강요하는, 잊고 싶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시 주석이 반대파의 의견을 뭉개며 ‘강권자(strongman)’ 이미지를 굳히고 있어 문혁 시대의 마오가 연상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내에서 시 주석의 노선과 맞지 않는 의견이 나오는 것을 ‘부적절한 토론’이라는 이유로 금지할 정도로 철저한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며 시 주석으로의 ‘권력집중과 개인숭배’로 인해 문혁시대 마오의 망령이 어른거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하고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축출한 마오쩌둥은 자신감에 넘쳐 영국 등 서방 선진국을 단기간에 따라잡겠다며 1959년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3년 가뭄과 대기근까지 겹쳐 3000만∼4000만 명이 아사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결국 마오는 류샤오치(劉少奇) 국가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총서기 등에 밀려 권력 일선에서 물러났다. 마오는 자신을 향한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 복귀와 반대파 숙청을 위해 학생 등 홍위병을 동원한 문혁을 발동했다.

문혁 50주년을 앞두고 ‘문혁시대 회귀’ 논란이 일자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10일 “공산당 지도사상에 좌경화의 잘못이 나타나 문혁 같은 10년 동란이 발생했고, 중국은 문혁 기간에 세계와 격리돼 있었다”는 시 주석의 발언을 공개했다. 시 주석이 올 1월 성부급(장차관급) 회의에서 했던 말이다. 넉 달 전 발언을 뒤늦게 공개한 것은 1981년 중국 공산당 11기 6중전회가 내린 ‘당과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안겨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라는 문혁의 평가를 시진핑 정부가 재확인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홍색(紅色)음악회’의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56개 소수민족을 대표해 56명의 16∼23세 소녀로 구성된 문화선전공작단은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주관한 당시 공연에서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와 같은 ‘홍색 가요’와 함께 시 주석을 찬양하는 노래 ‘어떻게 칭호를 불러야 할지 몰라요’, ‘만두가게’ 등을 불렀다. 시 주석 부인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의 대표곡 ‘희망의 들판에 서서’ 등도 공연에서 불렀다.

공연이 문혁을 찬양했다는 논란이 일자 ‘홍색 2세대’를 자처하는 마샤오리(馬曉力) 씨는 당 중앙판공청에 서신을 보내 “문혁 찬양은 반당(反黨)행위”라며 행사 관계자 처벌을 요구했다. 관할 시청(西城)구는 “행사 주최 측이 당 선전부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해명했지만 시 주석으로의 권력 집중에 따른 우상화 기류가 ‘찬양음악회’로까지 이어졌다는 의구심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본토 언론이 문혁 50년에 침묵한 가운데 홍콩 밍(明)보는 15일 “문혁 기간은 10년으로 길지 않지만 중화민족 역사에 뼈에 새길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문혁을 철저히 검토하고 반성하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밍보는 앞으로 며칠간 문혁 특집 기사를 내보낼 것이라고 예고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문화대혁명#중국#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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