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광표]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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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오피니언 팀장
이광표 오피니언 팀장
지난해 9월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7억5000만 원에 팔려 화제가 됐던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이를 구입한 국립민속박물관이 보존처리와 연구조사 등을 마치고 최근 전시를 시작했다.

1810년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은 부인 홍 씨가 보내온 빛바랜 치마를 받았다.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것이었다. 치마를 오려 두 아들을 위해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어 서첩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하피첩’이라 이름 붙였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 3년 뒤엔 남은 치마폭을 오려 그림을 그렸다. ‘매조도(梅鳥圖)’라는 작품이다. 정약용이 유배 갈 때 겨우 여덟 살이던 딸. 그 딸이 무사히 자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반가워하며 그림을 그려준 것이다.

‘하피첩’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경(敬)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라’ ‘명심하고 당파적 사심을 씻어라’ ‘사대부가의 법도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바로 산기슭에 거처를 얻어 처사(處士)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만약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해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마음가짐, 공부하는 법뿐만 아니라 집안이 몰락해도 자존감을 잃지 말고 훗날을 도모하라는 당부도 있다.

정약용이 유배를 간 것은 천주교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1784년 창설된 한국 천주교의 초창기 전교와 순교의 한복판에는 정약용 형제들(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 있다. 이론 정립과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벽은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황사영 백서(帛書)사건으로 1801년 충북 제천 배론 토굴에서 붙잡혀 참형을 당한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었던 죄로 1801년 흑산도로 유배를 가 ‘자산어보’를 썼다. 천주교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약종은 1801년 서울 서대문 밖에서 참형을 당해 순교했다. 이뿐만 아니다.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고 1801년 참형을 당했다.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었다. 한국 천주교 초창기의 이론가 실천가들은 모두 정약용 일가와 연결되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였으나 집안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배교를 했다. 정약용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폐족(廢族)이었다. 천주교의 여파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유배 시절 내내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바른 마음으로 공부에 힘을 기울여 집안을 다시 일으키라고 주문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피첩’과 ‘매조도’ 전시는 다산의 흔적과 내면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정약용의 흔적에 그치는 건 아니다. ‘하피첩’ 탄생의 근본 배경엔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올해는 병인박해와 병인순교 150주년이다.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순교의 정점이었지만, 박해와 순교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의 순교 위에서 태어났다. 김훈의 소설 ‘흑산’에는 18세기 말 천주교를 믿으며 평등의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정약전 황사영도 나오고 이름 없는 민초(民草)도 많다. 소설을 읽으며 시종 ‘그들은 왜 기꺼이 순교를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천주교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18, 19세기 천주교 순교는 엄연한 역사다. 순교의 시각으로 그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광표 오피니언 팀장 kplee@donga.com
#정약용#하피첩#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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