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혐오 넘어선 ‘유럽의 오바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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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시장에 첫 무슬림 당선… 파키스탄계 이민2세 사디크 칸
흙수저 vs 금수저 대결서 승리… “내게 준 기회, 모두에게 베풀 것”
일각선 “이슬람, 유럽 점령” 경계

기독교 전통이 강한 서구 유럽의 대도시에서 최초의 무슬림 시장이 나왔다.

5일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에서 파키스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의 노동당 후보 사디크 칸(45)이 득표율 57%로 잭 골드스미스 보수당 후보(41)를 제치고 런던 시장에 당선됐다. 칸 신임 시장은 7일 런던 서더크 대성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런던 시민들이 두려움 대신 희망을, 분열이 아닌 통합을 선택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서구 언론은 ‘유럽의 오바마’ ‘정치적 랜드마크’라며 칸의 당선 소식을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난민과 테러 사태 이후 인종과 종교 갈등 및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휩쓰는 상황에서 런던이 다문화와 톨레랑스(관용)의 얼굴을 보여준 역사적 선거”라고 평가했다.

이번 런던 시장 선거는 ‘흙수저’ 칸과 ‘금수저’ 골드스미스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칸 시장은 버스 기사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의 8남매 중 다섯째다. 반면 골드스미스는 독일계 유대계 재벌 가문 출신으로 물려받은 유산만 12억 파운드(약 2조 원)에 이른다. 재혼한 부인도 금융 명문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손이다.

칸 시장은 청소년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하고 여름철에는 공사장에서 일했다. 북런던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2008년 노동당 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 교통부 차관에 임명되면서 주목받았다. 영국 내각에 진출한 첫 무슬림이었다.

칸 시장은 취임 연설에서 “공영주택 단지에서 자란 내가 오늘 여기 있을 수 있는 비결은 이 도시가 우리 가족과 내게 베푼 기회와 도움 덕분”이라며 “도시가 내게 준 기회를 모든 시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선거공약으로 지하철 기차 버스 요금을 4년간 동결하고 서민들도 도심 외곽이 아닌 시내에서 살 수 있도록 저렴한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고 했다.

칸의 당선을 놓고 유럽에서는 ‘이슬람의 유럽 점령’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BBC에 따르면 런던시민 8명 중 1명은 무슬림이고 백인은 45%밖에 안 된다. 골드스미스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칸과 이슬람 극단주의를 연결하려는 전술을 썼다. 칸 시장은 8일 일간 옵서버 기고문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이 지역공동체를 분열시키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의 전술에 나올 법한 술수를 썼다”고 맹비난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도 이날 칸의 당선에 대해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공포증)’에 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는 트위터에 “파키스탄 버스 기사의 아들이자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의 수호자가 런던 시장이 됐다”며 축하 메시지를 올렸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 시장, 안 이달고 파리 시장 등 세계의 유력 정치인들도 당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는 트위터에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칸 시장은 미국 방문을 금지당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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