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책임없다던 옥시 英본사, 가습기 살균제 출시때 승인해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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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 문건확보… 본사관계자 수사 검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2001년 옥시레킷벤키저가 살균제를 출시할 당시 영국 본사가 한국법인에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원료로 한 제품을 내놓아도 좋다고 승인한 사실을 포착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이는 그동안 옥시 영국 본사가 “한국법인은 법적으로 독립적인 회사로, (우리는) 제조 판매에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해온 것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옥시 한국법인 전현직 임원은 물론이고 영국 본사 관계자까지로 수사 대상을 확대해 이들이 안전 의무를 다하지 않고 제품을 출시한 사실이 확인되면 소환조사와 기소를 비롯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 “출시 당시 영국 본사 승인”

특별수사팀은 살균제 제조 단계인 2001년부터 사건 발생 후인 2012년 사이에 재직한 옥시 경영진과 임원 등으로 수사 대상을 크게 확대할 방침이다. 현재로선 해당 기간 옥시 고위 임원 등 최소 20여 명이 입건 대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19일 옥시의 인사담당 상무 등 2명을 맨 처음 소환한 것도 회사의 의사결정 구조를 파악해 형사처벌 대상 범위를 가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옥시 영국 본사 관계자에 대한 수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2001년 PHMG로 성분을 변경해 제품을 출시할 때 본사의 승인을 받은 문건을 확보한 데 따른 것이다. 신현우 당시 옥시 대표이사가 제품을 출시하기 전 본사의 승인을 받았다면 본사 관계자 조사도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은 조사를 통해 옥시 본사가 어떤 경로로 이를 허락했는지,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점은 없는지 등을 살펴볼 계획이다.

검찰의 소환 대상에는 신 전 대표 외에 샤시 쉐커라파카 전 옥시 대표 등 외국인 전직 대표들도 포함된다. 그는 2013년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피해자들에게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제품을 판매할 때는 안전하다고 믿었다”고 발언한 바 있다. 검찰은 광범위한 독성실험 결과 조작과 위험성을 축소 및 은폐하려던 옥시의 행각을 옥시 전 대표들이 보고받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영국 본사가 국내 법인의 조직적 증거 은폐 정황을 알고도 묵인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사안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수사 결과에 따라 수년간 PHMG 성분이 든 ‘스카이바이오1125’를 제조사에 판매한 SK케미칼도 형사처벌 대상에 포함될 소지가 있다. SK케미칼 측이 PHMG가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사용되는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 PHMG의 위험성을 알고 고지했을 가능성이 큰 만큼 PHMG 사업부문 관련자들이 업무상 과실치사의 방조범으로 처벌될 수 있다.

○ ‘해외 약화 사건’ 판례 연구로 소송 대비

특별수사팀은 과거 해외에서 일어난 다양한 약화(藥禍) 사건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다. 관련자 기소도 중요하지만 법정 다툼에서 피의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을 제대로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검찰은 독일의 ‘피혁스프레이 사건’ 대법원 판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의도치 않게 소비자들이 유해한 화학물질을 흡입해 많은 피해자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유사하다.

독일에서는 1980년 늦가을부터 소비자들이 구두 등 가죽에 광택을 내기 위해 뿌리는 피혁스프레이를 사용한 뒤 고열, 구역질, 폐수종(허파에 물이 고이는 질병) 등을 호소하는 사례가 속속 접수됐다. 제조·유통사들은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이듬해 5월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기존 제품을 그대로 팔았다. 다만 새로 제조하는 스프레이는 성분을 일부 변경하고 제품 포장에 경고문구를 넣었다. 그럼에도 생명이 위태로운 피해자들이 속출하자 1983년 독일 보건당국은 제품 판매 중지 및 회수 조치를 내렸고, 수사당국은 해당 제조·유통회사들을 재판에 넘겼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제조·유통회사의 대책회의 전에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과실 책임만 인정했지만 대책회의 이후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작위(作爲)에 의한 상해죄’를 적용했다. 피해를 알고 나서도 제품을 판매했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가습기 살균제 판매·유통업체들도 정부가 2011년 11월 제품 회수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기존 제품을 팔아 왔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논란을 인지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자진 회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법원의 엄중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신나리 journari@donga.com·장관석·김준일 기자
#옥시#영국본사#가습기#살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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