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팔릴 책’만 골라 펴내는 출판계 게릴라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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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전쟁일기’ 등… 문학책 3권 펴낸 ‘읻다 프로젝트’

출간한 책을 들고 웃고 있는 다다, 정수윤, 김보미, 최성웅, 박술, 김잔섭 씨(왼쪽부터). 출판사 직원인 다다, 잔섭 씨는 비트겐슈타인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들은 ‘읻다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올해 1월 서울지하철 합정역 인근 파주출판단지행 버스정류장에서 출간한 시집에 담긴 시를 쓴 피켓을 들고 서 있기도 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출간한 책을 들고 웃고 있는 다다, 정수윤, 김보미, 최성웅, 박술, 김잔섭 씨(왼쪽부터). 출판사 직원인 다다, 잔섭 씨는 비트겐슈타인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들은 ‘읻다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해 올해 1월 서울지하철 합정역 인근 파주출판단지행 버스정류장에서 출간한 시집에 담긴 시를 쓴 피켓을 들고 서 있기도 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출판계 게릴라들이 등장했다. 20, 30대 편집자, 디자이너, 번역가 등 ‘12명+알파(α)’로 구성된 ‘읻다 프로젝트’가 2년간 작업해 문학성이 짙은(한편으로 팔릴지는 의문스러운) 책 3권을 최근 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쓴 세 권의 일기를 묶은 ‘전쟁일기’, 루이페르디낭 셀린이 스스로를 인터뷰해 쓴 소설 ‘Y교수와의 대담’, 일본 시인 미즈노 루리코가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회상한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다. 》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5일 저녁 6명의 게릴라가 모였다. 낭독회, 페이스북 등을 통해 알게 된 이들은 출판사 직원, 어학 강사 등 생업이 있다.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투자해 책을 만든 건 상업성만 추구하는 출판계에서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러시아 소설을 내고 싶어 제안을 해도 번번이 물을 먹었어요. 안 팔린다는 거죠.”(다다 씨·예명)

“이름 있는 작가들하고만 작업해요. 그게 안전하니까요. 실험해 보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여지가 아예 없어요.”(김잔섭 씨·예명)

판매 부수와 유명 작가에 대한 섭외력에 따라 편집자의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에 숨이 막혔다는 이도 있었다. 한 대형 출판사 면접에서는 면전에서 탈락 통지를 받았단다. 편집을 시킨 후 곧바로 채점한 뒤 “당신은 B마이너스다. 우리 회사는 B플러스 이상만 올 수 있다”고 통보한 것. 오랜 시간이 걸려도 책을 잘 만드는 사람보다는 단시간에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원하는 게 한국 출판계의 현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번역자는 디자인 등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낼 수 없는 구조 역시 답답했다.

“책이 나온 후 표지나 장정이 별로면 힘들게 번역했던 숱한 날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어요.”(정수윤 씨)

이들은 작업 과정에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다. 전원합의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세 권을 만드는 데 모두 600만 원가량 들었다. 인건비는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서로에게 자료를 보낼 땐 퀵서비스 대신 대중교통을 타고 직접 전해주는 방식으로 한 푼이라도 비용을 줄였다. 클라우드 펀딩으로 1500만 원을 모았고, 게릴라들의 갹출로 2000만 원을 따로 마련했다.

“순수하게 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내가 이 책의 주인이라는 생각도 많이 들고요.”(김보미 씨)

박술 씨는 “책을 보니 꿈만 같았어요!”라고 외쳤다. 책은 좀 팔릴까.

“초판을 각각 1000권씩 찍었는데 ‘전쟁일기’는 출간 일주일 만에 추가로 1000권을 더 찍게 됐어요.”(최성웅 씨)

각각 700권씩만 팔리면 제작비는 건진다고 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릴케의 ‘두이노 비가’ 등 7권을 더 출간해 모두 10권을 내는 게 1차 목표다.

“인문·철학책을 누가 사보냐고들 하지요. 밤에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인문학 책을 읽고 계시더라고요. 그런 분이 대한민국에 1000명은 계시지 않을까요? 그러면 가능한 작업이라고 믿어요.”(최성웅 씨)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읻다 프로젝트#문학책#비트겐슈타인#전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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