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내밀한 기억으로 초대하는 폴 오스터의 손짓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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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폴 오스터 지음/송은주 옮김/368쪽·1만3800원/열린책들
세 개 장으로 이루어진 회고록… 2인칭 시점으로 일관하며 유년기부터 20대 섬세하게 복원

저자가 열 살 때인 1957년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친구와 관람한 영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서서히 줄어들어 결국 무(無)에 가까워진 남자의 이야기를 지켜본 경험에 대해 저자는 “극장 객석에 앉은 내 안에서 세상이 모습을 바꿔버린 기분이었다”라고 썼다. 열린책들 제공
저자가 열 살 때인 1957년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친구와 관람한 영화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서서히 줄어들어 결국 무(無)에 가까워진 남자의 이야기를 지켜본 경험에 대해 저자는 “극장 객석에 앉은 내 안에서 세상이 모습을 바꿔버린 기분이었다”라고 썼다. 열린책들 제공
3년 전, 66세이던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가 쓴 이 회고록은 3개 장으로 나뉘어 있다. “어른 앞에서 마지막으로 무너져 울었던” 열두 살 때 학교 수업 기억으로 끝맺은 첫 번째 장 제목이 그대로 책 제목이다. 열 살과 열네 살 때 본 인상 깊은 영화 두 편의 세세한 복기(復棋)로 두 번째 장 ‘머리에 떨어진 두 번의 타격’을, “책을 쓰기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후 소설가인 첫 아내에게서 건네받은” 100여 통의 연애편지를 추려 세 번째 장 ‘타임캡슐’을 채웠다.

책 말미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그 아래 메모한 독자로서의 소감은 ‘유년기에 대해 쓴 첫 장만 따로 단출하게 출간했으면 좋았겠다’는 것이었다. 대개의 삶에서 어린 시절이 그렇듯 첫 번째 장은 마디마디 곱게 빛난다. 시선의 흐름을 멈추고 사적인 기억과 엮어 찬찬히 음미하고 싶어지는 문장으로 빼곡하다. 작가의 첫마디처럼 ‘모든 것이 살아 있다’.

“가장 작은 물체조차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녔었다. 가위는 걸을 수 있었고 시계판은 사람 얼굴이었고 그릇 속의 완두콩 하나하나가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 얼굴 모양을 한 달 표면의 반점을 보며 진짜 사람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정말 그랬다.

‘어린 소년으로 살았던 시간의 잔여들’에 대한 기억은 오스터가 쓴 대로 ‘완전히 잃어버린 머나먼 시간 속에서 생각했다고 여기는 것일 뿐인 뒷날의 기억에 불과한 기억’일지 모른다. 그런들 어떤가. 푹신한 팔을 가진 라임오렌지나무가 실은 밍기뉴였던, 아무 모순 없이 가끔씩은 슈르르까였던 기억을 잠시 돌이켜 주는 글은 고맙도록 나른하게 달큼하다.

작가는 모든 문장의 주어를 ‘내가’ 대신 ‘당신은’으로 적었다. 재생하는 기억은 분명 오스터 자신의 것이지만 제3자의 손이 자판을 두드리며 바로 앞에 앉은 작가의 기억을 일깨워주는 듯한 시선으로 일관한다. 책장을 넘겨 익숙해질수록 이 방식이 독자로서 유용하게 여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풍요로운 미국에서 조직된 유태계 백인의 유년기 기억 프레임이, 20여 년 뒤 서울에서 구성된 독자의 유년기 기억을 소환하는 효과적인 촉매로 작용한다.

하지만 골방에서 온갖 공상을 부풀려 곱씹으며 보낸 시간의 행복한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내던 글은, 사춘기 맞은 소년이 느닷없이 징그러워지듯 책 중반부를 지나며 돌연 변모한다. 그 지점부터 대개의 문장은 ‘나와 전혀 무관한 공간과 시대를 살아간 남 얘기’일 따름임을 확인시킨다.

전처에게서 돌려받은 편지뭉치 갈무리를 늘어놓기에 앞서 저자는 ‘일기를 열심히 쓰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대한 변명을 적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왜 굳이 수고스럽게 자신에게 들려준단 말인가. 왜 경험한 것을 되새기는가. 그땐 너무 어려서 나중에 얼마나 많은 걸 잊어버리게 될지 몰랐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급속도로 징그러워지기 전의 아주 짧은 시절 기억만 되짚어, 오스터의 방법을 차용해 ‘당신’이라는 주어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맥스웰 쿠체와 2008∼2011년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디어 존, 디어 폴’이 함께 출간됐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내면 보고서#폴 오스터#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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