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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이 말하는 2016 화두]<6>‘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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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이 말하는 2016 화두]<6>‘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김호 위기관리 전문가·더랩에이치 대표입력 2016-01-20 03:00수정 2016-01-20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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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호 위기관리 전문가·더랩에이치 대표
#1.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중견 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차장은 오전 7시 30분에 집을 나서 근무를 한 뒤, 오후 7시 내키지 않는 버스에 올라야 했다. 회장님이 “악바리 정신을 기르기 위해” 주도하는 지리산 등반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선물을 주고받고 저녁을 함께해야 할 날에. 버스를 타고 지리산에 도착하여 대기하다 오전 4시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김 차장은 오전 8시 15분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가족들은 앞으로 있을 성탄절을 얼마나 힘들어할까.

#2. 지인의 상사는 저녁은 물론이고, 새벽에도 카톡으로 업무 지시를 내린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후배는 상사의 전화를 못 받으면 혼나기 때문에 샤워를 할 때도 비닐봉지에 전화기를 넣어 옆에 두어야 한다.

#3. 직장인들 상당수는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인 휴가를 쓸 때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 휴가 요청에 상사는 턱을 들며 “어디 가려고?”라고 물으며 제동을 건다. 출산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주먹만 폭력의 도구가 아니다. 위의 사례처럼 개인의 삶을 짓밟는 것도 폭력의 한 모습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어느새 우리가 이런 폭력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회장님의 취미가 직원들의 주말 워크숍으로 변하고, 저녁과 주말에 고객이나 상사가 상시로 업무 요청과 지시를 하고 휴가를 못 쓰게 해도 우리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들과 미리 한 약속이 상사의 갑작스러운 회식과 겹치면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실험을 통해 전기충격을 준 상황에서 이를 피할 수 없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개들은 무력감을 학습하여 이후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조건에서도 수동적으로 전기충격을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우리도 ‘학습된 무력감’을 갖고 살아간다.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도 우리는 ‘한국 사회는 원래 그런 거야’라고 생각한다. 며느리들은 명절마다 시부모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전통이라고 받아들여 왔다. 나는 시민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모습의 폭력에 대해 보다 민감해지고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때, 우리 정치도, 사회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폭력을 학습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예절’이라고 믿어오던 것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자기 삶의 터전에서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민이 어떻게 정치를 바꾸겠는가. 지난 대선 당시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표어도 그래서 주목받았다. 개인 삶의 행복과 주체성을 회복할 때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윗분’들인 부모와 교사, 상사들은 우리를 자율성을 갖춘 독립적인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고, 우리도 스스로를 ‘윗분’들의 바람을 실현하는 존재로 바라봤다. ‘권위에의 복종’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용어를 빌린다면 ‘대리자적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300명이 넘는 국민이 차가운 바닷속에 수장되어도, 농민이 시위 중에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도, 간장회사 회장이 직원을 폭행해도, 우유회사가 갑질을 해도, 가습기 살균제 문제로 140명 넘게 사망해도 우리는 ‘학습된 무력감’으로 받아들인다. 부모와의 대화, 상사와의 회의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없는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새해에는 무조건 순응하는 효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식이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자. 낮밤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지시하는 상사라면 동료들과 함께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상의하자. 인권과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는 우유, 간장, 가습기 살균제 회사 제품은 절대 사주질 말자. 원인 제공자들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 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가정과 직장에서 개인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멀다.

김호 위기관리 전문가·더랩에이치 대표


#무력감#폭력#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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