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옥 기자의 야구&]‘미운 오리’ 알아본 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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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윤 데려와 홈런타자 만든 SK 김용희 감독-정경배 코치
‘FA 먹튀’ 강민호 살린 장종훈… 제자들의 인생을 바꾼 스승들

불교 법망경은 인연을 겁(劫)으로 설명한다. 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 다음 개벽 때까지로, 시간으로 따지면 수십억 년이다. 8000겁의 인연이면 부모와 자식이 되고, 9000겁이면 형제자매로 만난다. 최고 단계인 1만 겁일 때는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는다고 한다.

사제의 인연은 그만큼 소중하고, 그만큼 중대해서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다. 올해 프로야구 정의윤의 인생역전도 그러한 사례다. LG 시절 8년 넘도록 홈런 31개에 그쳤던 정의윤은 7월 SK로 이적해 50여 경기에서 14개의 홈런을 몰아치면서 박병호에 견줄 홈런타자로 부상하고 있다. 김용희 감독과 정경배 코치라는 두 스승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김 감독은 이적 직후 정의윤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았다. 안정적인 출전을 보장했다. 덕분에 이전엔 삼진 먹고 행여 교체될까 더그아웃을 쳐다보곤 했던 정의윤은 소신껏 스윙할 수 있었다. 정 코치는 좀 더 길고 무거운 배트를 쓰라고 조언했다. 타고난 힘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편안한 환경과 핵심 조언이 합쳐지자, 가능성은 현실이 됐다. SK도 정의윤 효과를 누리며 바닥권에서 5위로 뛰어올랐다. 김 감독은 “정의윤 덕에 중심타선의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게 복(福)이 됐다.

LG에서 kt로 옮겨 달라진 박경수도 비슷한 사례다. 거포의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시즌 최다 홈런이 8개에 그쳤던 박경수는 올해 무려 22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조범현 감독의 배려 속에 히팅 포인트를 앞으로 당기면서 본능을 되찾은 결과였다. 듣고 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연륜과 함께 선수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미세한 히팅 포인트의 변화다.

‘FA 먹튀’ 강민호를 살린 것도 스승이었다. 75억 원이라는 당대 자유계약(FA) 선수 최고 계약을 맺은 강민호는 첫해인 지난해 타율 0.229, 홈런 16개의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다혈질의 롯데 팬들로부터 ‘돈값 못 한다’는 욕을 수도 없이 먹었다. 올해 롯데로 옮긴 홈런왕 출신 장종훈 코치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짧은 조언을 던졌다. 몸의 중심과 히팅 포인트를 앞으로 옮겨 장타력을 높이게 한 것이다. 강민호는 KBO리그 포수 최초로 3할 타율-30홈런-100타점에 도전하고 있다.

늘 좋은 결과가 있는 건 아니다. 정반대의 악연도 있었다. 지금은 거포의 대명사가 된 이대호(소프트뱅크)는 애초에 싹이 잘릴 뻔했다. 2002년 롯데 백인천 감독은 100kg이 넘던 이대호의 ‘살’을 문제 삼았다. ‘스피드 야구’를 추구했던 터라, 이대호의 장점인 ‘파워’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대호는 그라운드는 물론이고 사직구장 관중석 계단에서까지 쪼그려 뛰기를 해야 했다. 거포에게 발 빠른 선수가 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해 말 무릎 연골 파열로 수술을 받았다. 백 감독은 이듬해 성적 부진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대호는 그 후에 비로소 힘을 키워 2006년 트리플 크라운(홈런 타점 타율 3관왕)을 차지하며 만개했다.

1만 겁으로 이뤄진다는 사제의 인연. 그 궁합에 따라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기도 하고, 백조가 미운 오리 새끼가 되기도 한다. 악연(惡緣)과 선연(善緣)이 어디에서 어떻게 갈라지는지, 프로야구의 사례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윤승옥 기자 touch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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