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 둔 가정 ‘호르몬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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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엄마 vs 사춘기 아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뒤늦게 저 아이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을 할까.’

다국적 기업의 여성 임원인 이모 씨(52)는 자신에게 책가방만 던진 뒤 저 멀리 뛰어가는 중학교 1학년 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씨는 첫딸을 낳은 지 8년 만인 30대 후반에 생긴 늦둥이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왔다고 자부했다. 특히 ‘나이 많은 엄마’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들은 말수가 부쩍 줄더니 이젠 엄마랑 말도 안한다. 이날도 담임교사와 면담이 있어 학교에 왔더니, 아들은 “여긴 왜 왔느냐”며 화를 내더니 순식간에 친구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 씨는 “30년 가까이 커리어우먼으로 살아왔지만, 아들은 내가 영어 단어 하나 틀려도 ‘무식하다’며 무안을 준다”며 “나도 갱년기라 그런지 사춘기 아들의 이런 행동이 첫째 때와 달리 야속하고 힘들다”고 토로했다.

○ 짜증 내고 미안해하는 엄마와 아들

30대 중후반부터 40대 초반에 아이를 낳은, 이른바 ‘늦둥이’ 출산이 붐을 이룬 건 10여 년 전부터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현재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2차 성징 발현기를 뜻하는 사춘기는 보통 남자의 경우 만 12∼13세, 여자의 경우 만 11∼12세에 시작된다. 그러면서 엄마의 갱년기(폐경이 생기는 만 50세 전후 4, 5년)와 자녀의 사춘기가 겹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실제로 자녀의 사춘기로 인해 서로 간의 갈등이 증가돼 엄마의 갱년기 우울증이 촉발되는 사례가 꽤 많다”며 “만혼과 늦은 출산으로 인해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춘기와 갱년기 모두 호르몬의 변화에 의한 것인 만큼 두 시기가 겹치면 엄마와 자녀 모두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예민해지고 짜증이 늘며 우울감까지 생긴다. 둘 다 ‘(아이에게, 또는 엄마한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하지’ 하고 생각하지만, 실제 행동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김병수 교수는 “갱년기 엄마는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난 후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이로 인해 우울증이 더 악화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김붕년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사춘기 자녀 역시 생물학적 변화로 성적 욕구나 관심이 증폭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부모, 특히 엄마한테 과격한 언행을 한 후 당황해하는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가진다”고 했다.

이 같은 갈등은 엄마와 아들 사이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 사회에서 육아와 자녀 교육의 책임을 엄마가 전적으로 맡고 있는 데다 보통 아들이 딸보다 더 심한 사춘기 갈등을 겪기 때문이다. 아빠와 딸은 큰 다툼이 없더라도 서로 거리를 두는 형태로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김붕년 교수는 “엄마와 아들, 아빠와 딸처럼 이성 간 갈등이 심한 이유는 세대 간 장벽뿐 아니라 성적 차이로 인해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결국 부모가 자녀를 인정하고 기다려줘야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아들 모두 힘든 시기지만, 이런 갈등을 줄이려면 엄마가 먼저 노력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특히 아들이 더 이상 좌지우지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걸 인정하고 이 시기만 지나면 아이가 괜찮아질 것을 믿으며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엄마가 갱년기 증상을 겪는 상황이라면 아빠가 아들과 함께 운동하며 관심사를 공유하는 등 적극적으로 양육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엄마의 갱년기 증상이 심각하다면 호르몬 치료를 받는 것도 권할 만하다. 이지영 건국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사춘기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지만 갱년기는 다르다”며 “주변에서 인지할 만큼 힘들어한다면 전문 치료를 받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갱년기#사춘기#호르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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