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이젠 이병헌을 놓아주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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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1. 배우의 연기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난해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난 할리우드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 ‘블러바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토록 완벽하고 절실한 연기를 하는 배우의 다음 목표는 오직 죽음밖엔 없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될 만큼 그는 이 영화에서 한평생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온 은행원의 내면에 완전하게 몰입한다. “카르페 디엠(현재를 살아라)”이란 라틴어 대사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그가 외쳤던 것처럼, 윌리엄스는 수십 년 쌓아온 막대한 부와 커리어를 뒤로한 채 현재의 고독과 우울을 철저하게 마주했던 것이다.

대사 대신 침묵을 던지며 오만 감정을 담아내는 회한의 우주 같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노라면, 동성애는 성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이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마음을 열 수밖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자신감 없이 머뭇거리며 부유(浮遊)하는 영혼을 주로 표현해온 그는 스스로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였을까. 연기와 삶을 치열하게 일치시킨 그는 몰입이라는 예술가의 지독하고 매혹적인 직업병의 희생자가 되었다.

#2. 배우 유아인을 영화 ‘베테랑’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완득이’ ‘깡철이’처럼 짐짓 반항적이고 건들거리지만 진짜 내면은 깊고 따스한 청춘을 발군의 기량으로 연기하면서 사회적 소수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보여 온, 스스로 ‘진보’임을 감추지 않는 이 솔직한 스물아홉 살 배우는 알고 보니 재벌 3세를 연기할 때 더욱 한계를 모를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뿐 아니라 가장 미워하는 대상을 연기할 때 스스로 영혼을 바치게 되는 것 같다. 문성근이 영화 ‘한반도’에서 통일엔 관심도 없는 ‘꼴보수’ 국무총리를 연기한 것이 그의 최고 연기 중 하나였듯이. 명계남이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며 모진 고문을 해대는 인물 ‘박전무’로 등장하면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악독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듯이 말이다. 배우의 진정성은 선의지뿐 아니라 타오르는 증오를 통해서도 생산됨을 확인하게 된다.

#3. 이병헌의 신작 ‘협녀, 칼의 기억’(협녀)을 보면서 이토록 흥행에 참패할 영화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무협영화는 ‘와호장룡’ ‘영웅’ ‘형사 Duelist’ ‘킬빌’, 심지어는 ‘취권’의 기시감마저 들 만큼 창의성이 부족하며 이야기도 촘촘하지 못하지만, 이병헌의 연기만큼은 역대 그의 작품 중 최고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50억 협박사건’ 이후 이 영화는 수차례 개봉이 미뤄졌고 이병헌이 얼마 전 제작발표회에서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지만, 결국 대중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 영화를 외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분명한 점은, 이병헌은 이 영화의 깊이와 메시지와 정조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한 거의 유일한 배우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연기한 ‘유백’은 권력을 탐하면서 의리를 저버리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의 연기가 얼마나 절실하던지 약속과 의리와 대의를 지키려는 영화 속 착한 인물들이 외려 비현실적이고 바보 같고 설득력 없게 느껴질 정도다. “보아라. 사람은 본디 저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날 뿐이다. 저렇게 보잘것없는 자가 가진 것을 왜 너는 한 번도 탐낸 적이 없느냐. 탐을 내거라. 가져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라”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영화 속 이병헌은 알고 보면 죽는 순간까지 소유와 획득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협녀’를 보고나서 이병헌의 스캔들이 더욱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토록 진정성 있고 비장하며 철학적이고 깊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개입되기엔 너무도 얇고 천박한 사건이 아닌가. 이병헌의 연기는 그의 생각과 고뇌와 독서와 삶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신이 선물해준 재능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고 결심했다. 이병헌을 용서하기로 말이다. ‘협녀’의 메시지는 영화 속 이 외마디 대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사사로움을 끊는 것이 바로 협(俠)이니라.” 이젠 우리도 이병헌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과 배신감을 거둬들이고 그를 오직 배우로서 평가해야 하는 시기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젠, 이병헌을 놓아줄 때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협녀#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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