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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1010235’ 쿵쾅쿵쾅, 누가 볼까 콩닥콩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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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1010235’ 쿵쾅쿵쾅, 누가 볼까 콩닥콩닥

곽도영기자 입력 2015-08-01 03:00수정 2015-08-0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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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삐삐 세대입니까
“너 ‘17171771’이 무슨 뜻인 줄 알아?”

1992년생에게 물었다. 잠시 기억을 짚는가 했더니 “자우림 노래 제목 아니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17171771은 디지털 번호판에서 거꾸로 보면 ‘I LUV U(아이러브유)’로 보이는 숫자다. 조그만 삐삐(무선호출기) 화면에 이 숫자나 ‘1010235’(열렬히 사모) ‘8253’(빨리 오삼)이 찍히면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번화가 공중전화부스 앞에는 삐삐 음성메시지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누구나 10원짜리 동전 몇 개는 주머니에 챙겨 다니던 시절이었다.

삐삐의 시대가 열리다

1980년대 중반, 삐삐는 유선전화와 우편만 있던 아날로그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집을 나서 어딘가 길거리에 있는 누군가를 원하는 때에 불러 통화할 수 있다는 개념은 신선했다. 지금은 40, 50대가 된 당시 2030세대는 ‘이렇게 좋은 시절이 오다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40대 후반인 한 여성은 “다방마다 전화기가 있어서 친구와 통화해야 할 때면 그 번호를 친구 삐삐에 남기곤 했다”고 말했다. 이내 다방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다방 언니’가 “‘314-9××’로 삐삐 치신 분?”이라고 번호를 부르기 전까지 모두가 귀를 세웠다.

초기의 삐삐는 숫자나 음성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1982년 서울 지역에 처음으로 회선이 깔리며 도입된 ‘모토로라 브라보’는 신호음 방식의 삐삐였다. 상대방이 전화기를 들고 삐삐 번호를 누르면 허리춤에서 ‘삐삐삐’ 하는 신호가 울렸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응급실 의사들의 필수품으로 쓰이기도 했다.

1984년 지금의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이 설립되고 뉴메릭(Numeric·숫자 기반)호출기가 도입되면서 삐삐 서비스는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수요가 늘자 1992년 서울 및 수도권에 2곳, 각 도에 한 곳씩 민간 삐삐 사업자가 선정됐다. 당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서울 및 수도권에서 서울이동통신과 나래이동통신이 사업자로 선정됐다.


1993년 민간 사업자들이 뉴메릭 삐삐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면서 업무 용도이던 삐삐는 비로소 개인 용도로 전환됐다. 삐삐 사용자는 매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당시 인기 그룹 공일오비(015B)와 HOT, 가수 김건모 등 인기 연예인들이 텔레비전 삐삐 광고와 공중전화 옆 삐삐 포스터에 등장했다. 바야흐로 ‘삐삐 시대’였다.

가입자 증가율 세계 1위

당시 삐삐 사업자이던 서울이동통신은 현재는 단말기형 삐삐 사업은 접고 주파수 대역을 활용한 사물인터넷(IoT) 관련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김준모 서울이동통신 부사장은 “1993년 9월 삐삐 사업을 시작하고 11월에 10만 가입자를 달성했다. 그달 말일에 현금으로 두둑한 봉투를 보너스로 받았다”고 회상했다. 가입자 30만, 50만 명을 돌파할 때마다 회사에선 현금 보너스가 나왔다.

삐삐는 무선 이동통신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수요가 세계 수준이라는 점을 처음 알렸다. 가입자 수가 수직 상승하면서 보편화된 지 5년도 채 안 된 1997년에 1500만 명에 이르렀다. 김 부사장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입자 증가율 1위였다. 글로벌 이동통신 콘퍼런스 같은 행사에 가면 한국 기업들은 굉장한 주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음성사서함은 삐삐가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한 서비스였다. 음성사서함 이용료가 월 3000원, 삐삐 이용료가 9000원으로 한 달 이용료는 총 12000원가량이었다. 음성사서함 서비스 가입자가 삐삐 가입자 수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전화를 걸어 상대가 받지 않으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지만, 당시엔 음성메시지 서비스가 주인공이었다.

삐삐 시대는 국내 전자 제조업계의 성장도 이끌어 냈다. 첫 도입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모토로라 단말기가 주류를 이뤘다. 민간 삐삐 사업자들이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려 삼성전자가 삐삐 단말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각종 색깔이 입혀지고 투명한 본체 디자인이 등장하는 등 모델별로 디자인이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은 1년마다 삐삐를 바꿨다. 팬택과 텔슨전자, 와이드텔레콤 등이 삐삐 시장에 뛰어들어 당시 상장까지 이뤄 낸 기업들이다. 류재호 서울이동통신 대표는 “삐삐가 돈이 되니까 당시 전국 대학에 전파공학과가 11개 신설됐다”고 말했다.

삐삐의 쇠락, 마지막 변신

삐삐 시대는 갑자기 왔던 것처럼 갑자기 저물었다. 1996년 삐삐가 한창 인기 절정일 때 초기 개인휴대전화(PCS)가 등장했다. KTF, 한솔, LG텔레콤 등 휴대전화를 들고 등장한 이동통신사들은 막강했다. 삐삐는 너무 쉽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삐삐 민간 사업자 직원들과 엔지니어가 대거 PCS 회사로 넘어갔다. 일반 직원 외에 아예 사장급 임원이 이직한 사례도 있었다. PCS 이통사들은 삐삐가 점유하고 있던 국내 시장을 통째로 바꾸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었다. 70만∼80만 원대였던 PCS를 공짜로 주면서 가입자를 끌어왔다. 전화 통화를 바로 할 수 있고, 사용한 만큼의 통화료만 내면 되는 PCS를 두고 숫자 메시지에 월정액 비용을 내야 하는 삐삐 사용자들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수년에 걸쳐 달성한 1500만 삐삐 가입자는 불과 3년 만에 수십만 명으로 수직 낙하했다.

사업자들의 길은 엇갈렸다. 나래이동통신은 사업권을 반납하고 2003년 문을 닫았다. 두루넷처럼 삐삐 사업을 접고 초고속 인터넷 사업으로 전향한 곳도 있었다. 한국이동통신은 삐삐 사업 부문을 리얼텔레콤에 팔았다. 마지막까지 삐삐 서비스를 끌고 간 리얼텔레콤은 2009년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서울이동통신은 삐삐 단말기 자체를 개선해 보려는 시도를 이어 갔다. 1999년 자체 연구 인력 50여 명을 투입해 양방향 삐삐를 개발했다. 기존 삐삐는 일방 수신만 가능했지만 양방향 삐삐는 소형 문자 키보드가 있어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녹음된 음성메시지도 삐삐에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연구팀이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끝에 2001년 양방향 삐삐를 출시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이용자는 2만 명에서 더 늘지 않았다. 김 부사장은 “당시 국내 이동통신 이용자들은 문자메시지에 익숙하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양방향·문자로 전환했으나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2015년 현재 음성통화보다 문자나 카카오톡 등 메신저 사용률이 더 높은 국내 이동통신 시장을 생각하면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시도였던 셈이다.

삐삐의 무선통신 주파수 대역을 활용해 사물인터넷(IoT)에 적용한 서울이동통신의 단말기들. 왼쪽부터 USB형 무선통신 단말기, 내장형 무선통신 모뎀, 외장형 무선통신 모뎀, 스마트 단말기. 서울이동통신 제공
IoT 서비스로 거듭나기

과거 수많은 음성 메시지와 숫자들을 실어 날랐던 삐삐의 주파수 대역은 이제 IoT 서비스 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국내 주요 이동통신 3사가 이용하고 있는 광대역과 달리 무선호출용 협대역은 낮은 전력으로 소량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어 특정 부문에서 오히려 효율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삐삐가 붐일 당시엔 초기 IoT라고 할 수 있는 부가 서비스에 대한 개발 시도도 있었다. 상용화는 대부분 이뤄지지 않았지만 서울이동통신이 개발 중이던 부가 서비스 중에는 무선호출 대역을 활용해 삐삐로 자동차 시동을 켜고 에어컨을 원격으로 제어하는 것도 있었다. 김 부사장은 “전력 사용량이 많을 때 삐삐를 쳐서 에어컨을 끌 수 있는 부가 서비스 프로모션을 한국전력과 같이 검토했었다”고 말했다.

서울이동통신은 이러한 경험을 살려 가로등 관제나 상수도 원격 검침 등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발주 사업들을 진행해 왔다. 땅속에 묻혀 있는 수도 검침 계량기나 외지에 있는 전력량계 등은 전력 소모량이 낮아야 배터리 교체 주기를 줄일 수 있다.

류 대표는 “IoT 시대를 맞아 우린 이제 ‘느린 무선이동통신’도 필요해진 것”이라며 “렌터카나 공용 자전거의 위치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서비스, 제주도 해녀의 입수 기록 관리나 비상용 호출기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등장한 삐삐 사용 장면. 방송 화면 캡처
▼“짝사랑 그 사람의 첫 메시지, 한참을 지우지 못했죠”▼

“추억은 영원히” 회원 3684명 삐사모


“삐삐는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삐삐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은 여러분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삐사모 가족 여러분만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과거의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삐사모)’ 카페 메인 화면에 올라 있는 내용이다. 회원 수 3684명의 이 카페는 시솝(Sysop·운영자)인 교사 강동욱 씨(39)가 2001년 만들었다. 삐삐 사용자들이 점차 휴대전화로 갈아타고 있던 시기였다. 2009년 마지막 단말기 삐삐 서비스 업체이던 리얼텔레콤이 파산하면서 서비스가 중지될 위기에 처했을 때 삐사모는 인터넷에서 서비스 중지 반대 청원 서명을 받고 이슈화에 앞장섰다. “하지만 시대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고, 지금은 이전의 추억들을 함께 나누는 공간으로 남아 있죠”라고 강 씨는 말했다.

강 씨의 첫 삐삐는 96학번 대학생 시절 첫 과외비로 산 8만 원짜리 단말기였다. 그 삐삐를 고장 날 때마다 수리해 가며 10년 가까이 썼다. 최대로 저장할 수 있는 음성메시지가 3개이던 때다. 오랫동안 좋아하던 사람의 첫 메시지를 한참 동안 지우지 못하고 수시로 저장 기간을 늘려가며 몇 년을 갖고 있기도 했다.

2004년 첫 휴대전화를 산 뒤에도, 강 씨는 서비스 종료 직전까지 삐삐를 버리지 못했다. 강 씨는 “요즘처럼 바로바로 연결되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기다림’이 갖고 있던 설렘과 궁금증이 그립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카페에는 최근까지도 “삐삐가 그립다” “추억의 삐삐 언어에 대하여” 등 예전을 돌이켜 보는 글과 함께 “삐삐 사고 싶어요” “사용 가능한 삐삐 구합니다” 등 관련 문의가 올라와 있었다. 예전처럼 정기 모임이 활발하진 않지만 강 씨가 카페를 닫지 못하는 이유다. 강 씨는 “삐삐는 우리 사회에서 ‘연결의 욕구’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수요의 발전이 결국 지금의 스마트폰 세상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삐삐#응답하라 1997#삐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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