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방 쌓고 다리 만들고… 교토 번영의 씨앗 뿌린 신라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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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7>신라인들의 흔적

① 교토 서쪽 아라시야마 지역에 있는 관광명소 도월교는 9세기 신라계 하타씨 출신의 진도창 스님이 지은 것으로 현대에 와서 콘크리트 자재로 복원됐다. 도창 스님 같은 도래인들은 다리를 놓고 농지를 개간하며 교토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② 아라시야마 주택가 건물 사이로 흐르는 수로는 과거 도래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끌어들인 물길을 후세 일본인들이 현대식으로 개축한 것이다. 아라시야마=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① 교토 서쪽 아라시야마 지역에 있는 관광명소 도월교는 9세기 신라계 하타씨 출신의 진도창 스님이 지은 것으로 현대에 와서 콘크리트 자재로 복원됐다. 도창 스님 같은 도래인들은 다리를 놓고 농지를 개간하며 교토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② 아라시야마 주택가 건물 사이로 흐르는 수로는 과거 도래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끌어들인 물길을 후세 일본인들이 현대식으로 개축한 것이다. 아라시야마=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 일본 주요 고대 역사서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인 야요이 시대에 이미 신라 백제 등 한반도 도래인들이 왜(倭)로 건너오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다.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홍윤기 선생은 2012년 국학원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야요이 시대 사람들은 나무 열매 따먹기, 바닷가 조개 줍기 등 원시적인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천일창이 건너가 태양신 숭상을 전파하고 선진 벼 농사법을 전수했으며 대장간 철기 제작 기술까지 전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교토 효고 현 일대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는 ‘오진왕 31년에 효고 현 아마가사키와 가까운 무코 항에 정박 중이던 배가 신라인들의 거주지에서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나 신라에서 조선(造船) 기술자 집단을 보내 선박을 건조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권태명 ‘한민족이 주도한 고대일본문화’에서 재인용)

신라 왕자 천일창과 함께 왜로 건너온 많은 신라인들은 제철을 비롯한 도자기 제작과 직물 분야에서 당시 한반도 선진기술을 전하며 왜의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이들 중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씨족이 5세기경 왜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하타(秦)’ 씨족이다.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는 그의 책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에서 ‘신라인들의 씨족인 하타는 백제에서 건너온 아야(漢) 씨족과 함께 일본에 직조 기술을 전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라며 ‘특히 닌토쿠왕부터 유랴쿠왕 시대까지 양질의 비단과 면, 방수 비단까지 생산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한 신라인들

하타 씨족은 명주실 뽑는 기술 외에 상업을 운영하고 발전시키는 일도 전했으며 배나 말을 이용해 무역을 하는 기술도 전했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교토를 포함한 주변 지역이 농업과 직물 산업 이외의 수단을 통해 점점 부를 축적해 갔다.

이들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교토 아라시야마(嵐山) 지역이다. 교토가 수도로 정해지는 헤이안 시대 때 귀족들의 별장지로 개발될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오사카와 인접한 교토 서부 끝에 있는 아라시야마는 한자 뜻 그대로 ‘바람이 부는 산’이다. 아라시야마 산 아래쪽에는 가쓰라가와 강(桂川)이 펼쳐져 있다. 올 4월 어둑어둑할 무렵 가쓰라가와 강을 찾았다.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1600여 년 전 이곳으로 온 신라인들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곳은 휴양지가 아니라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그렇다면 하타 씨족들은 어떻게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을까.

사실 가쓰라가와 강 일대는 가도노(葛野), 즉 갈대 벌판으로 불릴 정도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이 아니었다. 지금도 태풍만 왔다 하면 강물이 넘쳐 주변 주택가가 온통 물에 잠겨 버린다. 하타 씨족들이 처음 건너온 5세기 때에는 지금처럼 제방 시설도 없었을 터이니 피해가 더욱 심했을 것이 분명했다.

신라인들은 현지인들이 버린 땅에 둥지를 틀고 서로를 의지해 가며 이민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강 상류에 제방을 쌓는 것이었다. 낮게 둑을 쌓아 강물이 한 번 머물다 지나가도록 해 유속을 조절했으며 양옆으로 수로를 파서 인근 들판으로 물을 댔다. 당시 신라인들이 제방을 쌓았던 곳을 지금 일본인들은 ‘오이가와(大堰川)’라고 부르는데 이는 ‘큰 제방을 쌓은 강’이라는 뜻이다.

당시 제방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오이가와 주변에 양옆으로 매끈하고 길쭉한 수로가 건설돼 있는 것으로 보아 하타씨가 만든 제방이 현대판으로 업그레이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날 취재에는 한일 고대사에 정통한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 명예교수가 동행했다. 칠순이 넘은 그는 가는 곳마다 당시 제방 상상도까지 수첩에 일일이 스케치해 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는 “신라인들이 교토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그들이 없는 교토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다”며 “이전까지 밭농사밖에 지을 수 없었던 교토는 신라인들 덕분에 안정적으로 용수 공급이 가능해지면서 농업 지역으로 탈바꿈했다”고 했다. 진지한 그의 모습에선 ‘당신들이 잘 모르는 당신들의 조상 이야기를 내가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제방과 함께 이곳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이라고 하는 다리 도월교(渡月橋·도게쓰쿄)도 신라인들의 작품이다. 이 다리는 본래 목조로 만들어졌으나 전란과 홍수로 수차례 불타거나 유실되어 1934년 콘크리트로 재건축된 것이다.

○ 왜인들을 위해 제방을 쌓은 도창 스님

그런데 이곳에서 제방과 다리 건설을 진두지휘한 신라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타씨 출신의 진도창 스님(798∼875)이었다. 그는 교토 광륭사(廣隆寺·고류지) 9대 주지로 부임해 광륭사를 크게 중건한 인물이기도 한데 강물이 넘쳐 오이가와 제방이 무너지자 직접 가래를 들고 제방 축조 공사에 나서 사람들이 ‘보살이 환생했다’며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도창 스님은 836년 제방 공사를 벌이던 중 도월교를 지었는데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다리 난간에 붉은색 칠을 했다고 한다.

도월교 오른쪽에는 교토의 최고급 음식점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온다. 음식점 구경을 하다 보면 거리 입구에 서 있는 긴 비석을 놓치기 쉽다.

비석에는 ‘법륜사 도창 유업 대언지(法輪寺 道昌 遺業 大堰址)’라고 쓰여 있다. ‘도창 스님의 업적인 큰 제방터’라는 뜻이다. 법륜사(호린지)는 도창 스님이 수행했던 곳이다. 비석 글에 언제 세운 것인지는 안 나와 있지만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였다. 도래인 출신이지만 제방과 다리를 놓아 이 지역을 일군 도창 스님을 존경하는 일본인들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도월교를 건너자마자 법륜사가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매우 낡아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절은 도창 스님의 발자취를 느끼기보다 전망대를 구경하러 온 방문객들이 더 많은 듯했다. 전망대에 서니 아라시야마, 도월교는 물론이고 멀리 교토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법륜사를 나온 뒤 길을 잃고 주택가를 헤매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아파트 건물 옆길로 들어섰다가 신기한 구경을 하게 됐다. 아파트 건물과 건물 사이에 좁은 수로가 있는 것 아닌가. 물살도 강해 큰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런 수로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튿날 일본 사학자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토조형예술대 교수를 만나자마자 수로의 정체부터 물었다. 역시 예상대로 신라인들이 농사를 위해 강물을 끌어들인 길이었다. 후세 일본인들이 길을 없애지 않고 더 과학적인 현대식 수로로 개축해 용수 공급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다음 날 다시 이곳을 찾았다. 전날 보이지 않던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택가 놀이터 옆이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이치노이 제방비’라고 적힌 비석에는 도창 스님이 만든 제방 덕분에 여러 곳으로 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비석은 1980년 이 지역 수리조합이 세운 것이었다. 도월교 입구에 세워진 도창 스님 공덕비에 이어 제방비까지 보니 코끝이 찡했다.

교토 정착에 성공한 하타 씨족은 서쪽 지역에서 벗어나 교토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김현구 선생은 책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타씨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또 얼마나 사실을 반영한 숫자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5세기 후반에는 92부(部) 1만8670명으로 되어 있고 6세기 전반에는 7053호라고 되어 있는 기록들로 보아서 그 수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흔히 교토는 첨단과 전통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세계적인 도시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교토야말로 먼 옛날 문명의 씨앗을 뿌린 우리 조상들과 또 이들을 적극 받아들여 번영을 이루는 데 성공한 일본인들이 어우러진 문명 교류의 가장 뜨거운 현장이었다.

:: 하타(秦)씨 ::

교토 서부 아라시야마 지역에 처음 정착한 한반도 도래인 집단으로 백제계도 일부 포함됐지만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뤘다. 하타씨 인구가 크게 불어나면서 8세기 전반 일본 전체 인구의 28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라시야마=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18회 ‘한일 평화대사 곤지왕’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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