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필멸의 현실’ 부정하는 능력, 인류 진화의 원동력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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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본능/아지트 바르키, 대니 브라워 지음·노태복 옮김/400쪽·1만8000원·부키
“종의 계승에 결정적 역할한 현실 부정의 심리기제… 인류 비극 초래할 소지 있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상호주관성을 지닌 고등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부정’의 심리기제 덕분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부키 제공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상호주관성을 지닌 고등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부정’의 심리기제 덕분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부키 제공
#1. 몇 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인은 끝까지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지 못했다. 그의 자녀들은 의사로부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직후 말싸움을 벌였다. 어머니에게 인생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쪽과 환자 본인이 병명을 모르는 것이 투병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결국 담당 의사의 조언에 따라 병명을 숨겼고 지인은 그로부터 1년을 더 살다가 숨을 거뒀다. 그의 자녀는 “막판에 통증이 심해지면서 눈치를 챘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런 현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며 “마지막까지 편한 마음을 유지하셔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2.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의 하나로 당시 영국 정부의 유화책이 꼽힌다. 히틀러의 무리한 영토 요구에도 영국은 타협으로만 일관했다. 그사이 전비를 급격하게 늘린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뒤에야 영국은 1939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많은 학자들은 1937∼1940년 영국 총리를 지낸 네빌 체임벌린이 전운이 감돌던 당시 현실을 외면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졌다고 비판한다.

이 책은 인류의 기원을 ‘현실 부정’의 심리기제에서 찾는 독특한 시도를 담았다. 누구든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이 오직 사람에게만 있고, 그것이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주장이다. 현실 부정은 흔히 체임벌린 전 총리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만, 말기 암 환자와 같이 오히려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한 모든 의문은 ‘왜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동물들은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인간과 같은 고등 생물로 진화하지 못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특히 자신을 특별한 개체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일부 침팬지와 오랑우탄, 돌고래 등에서 발견됐음에도 왜 이들은 다른 개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생물이 이 단계에 이르면 자신도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 개체는 치열한 경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짝짓기에 나서지 않게 된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는 개체가 종의 죽음보다 자신의 안전을 더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음에 직면한 진화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 저자의 답은 간단하다. “어느 한 종이 죽음-불안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실 부정의 심리기제는 과감한 모험주의부터 내세를 그리는 종교성까지 다양한 인간의 성향을 해석하는 데 유용하다.

저자는 현실 부정이 종의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반대로 인류 비극을 초래할 소지도 있다고 말한다. 기후변화의 명백한 증거가 도처에 있지만 환경 파괴를 지속하고 있는 형국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모든 인류의 복지를 위해, 아울러 우리의 생물권과 지구를 위해 현실 부정 능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부정 본능#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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