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기억하는 남자와 망각하는 여자, 둘의 미래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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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기억/윤이형 지음/140쪽·8000원·은행나무

“기억은 예고 없이 떠올랐고, 그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당황스러운 것이 되었다.”

주인공 ‘나’(지율)는 열한 살 때 과잉기억증후군을 자각한다. 학교에서 돌아와 쇠고기야채죽을 먹는데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생후 9개월 당시 아기용 식탁에 앉아 먹은 으깨진 밥알과 호박, 당근 조각이며 자신을 돌보던 엄마의 옷차림까지 생생히 기억했다. 그의 기억은 어머니가 기록한 육아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기억을 조절하는 법은 쉽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이 끝없이 아래로 스크롤할 수 있는 새하얀 웹문서라고 상상했고, 기억들은 거기에 첨부되는 동영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갑자기 재생 버튼을 누른 듯 눈앞에 떠오른 기억은 그를 몽롱한 상태로 만들었다.

나는 타고난 기억력으로 의대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관둔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정반대의 여자 ‘은유’를 만난다. 은유는 반대로 자신의 삶마저 사회면 자투리 기사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둘의 사랑은 쉽지 않았다. 나는 안에서 폭발하는 기억 때문에 은유에게 집중하지 못했고, 은유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말하지 못했다.

소설 끝자락에서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불필요한 과거를 망각이라는 순리에 맡기고, 본래 그것들이 가야 했던 곳에 돌려놓고 싶었다”며 망각을 위한 약물 치료를 택한다. 저자는 그 장면에 “모든 것을 기억하기에 자기 세계에 갇혀 있던 ‘나’가 망각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담았다”고 했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둘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까. 결말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서 나는 먼 훗날 은유가 읽어줬던 소설의 기억을 되살리며 필사한다. 그 소설은 사고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다. 저자는 보르헤스 소설 인용구와 과잉기억증후군을 묘사하기 위해 참고한 정보 출처를 확실히 밝혔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개인적 기억#남자#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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