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동아일보] 레드카펫의 숨은 실력자들! Dressma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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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5월 11일 22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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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것 외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이면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뜻을 함축한 말이기도 하다. 호수의 수면 밑에서 열심히 앞뒤로 움직이는 물갈퀴의 수고를 알고 있다 해도 결국 백조는 수면 위에서 우아하게 떠도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가.

1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비가 사랑하는 디자이너 제니 팩햄. 2 디자이너 듀오 타마라 랄프와 마이클 루소.
1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비가 사랑하는 디자이너 제니 팩햄. 2 디자이너 듀오 타마라 랄프와 마이클 루소.

이런 상황은 패션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즌에 맞춰 매장에 진열된 아이템 하나가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고 또 단계별로 수많은 전문가들의 노고가 더해지지만, 소비자들은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에 특별히 감동받지도 않고 특별한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 행사의 레드카펫에서 조금 다른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호령하는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시상식 및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밟는 레드카펫. 그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레드카펫은 어느 순간부터 전 세계 패션 하우스들의 소리 없는 종합 격투기장이 되었다. 매년 2월의 단 하루를 위해 거대 패션 브랜드들은 이른바 포인트 퍼슨(Point Person)이라고 불리는 전담 스태프까지 두며 레드 카펫 위에서의 승리를 준비하고 있다.

셀레브러티를 사로잡은 랄프 & 루소
하지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서는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패션 하우스들보다, 이름을 들으면 오히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낯선 디자이너 브랜드를 입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베스트 드레서 리스트에 대거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그동안 물 밑으로 땀나게 발을 저어온 노력이 알려지며 대중적으로도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입을 모아 올해의 레드카펫 베스트 드레서로 지목한 스타는 다름 아닌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패셔니스타, 기네스 팰트로였다. 언제나 레드카펫 위에서 고급스러우면서도 패션 센스가 빛나는 드레스를 선보인 스타이기에 그가 올해 시상자로 참여할 것이 라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많은 패션 하우스들이 열렬한 구애 공세를 보냈고, 그가 최종적으로 어떤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 위를 걸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하루 전에 디자이너 톰 포드의 패션쇼가 뉴욕이 아닌 LA에서 처음 열렸는데, 기네스 팰트로는 톰 포드가 구찌 디자이너였던 시절부터 오랜 유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여러 상황으로 미뤄 톰 포드의 드레스를 입지 않겠냐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퍼졌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톰 포드도, 구찌도 아닌 프랑스의 오트쿠튀르 디자이너 랄프 & 루소(Ralph & Russo)의 살몬 핑크 드레스였다. 기네스 팰트로가 한쪽 어깨에 분홍색 장미가 만개한 디자인의 랄프 & 루소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등장하자 현장의 거의 모든 이가 일시에 감탄의 탄성을 자아냈다고 할 정도로 그의 드레스는 이견 없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아직 한국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랄프 & 루소는 시상식 드레스계에서 나름 명성이 자자한 디자이너 듀오다. 최근 들어 그 명성이 예전보다 식긴 했지만, 그래도 패션을 아트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는 파리의 오트쿠튀르 컬렉션에서 이들은 실력자로 꼽힌다. 요즘은 장인정신이 여실히 드러나는 최고급 오트쿠튀르뿐 아니라 웨딩드레스가 이 브랜드의 인기의 한 축으로 급부상 중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선보인 기네스 팰트로의 드레스 덕에 이 디자이너 듀오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처음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사람은 안젤리나 졸리다. 안젤리나 졸리는 최근 몇 년간 각종 레드카펫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감독한 영화 ‘언브로큰’의 시사회를 위한 레드카펫에서도 랄프 & 루소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다. 특히 이 디자이너 듀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쪽 어깨에 만개한 꽃 장식의 칼럼 드레스는 안젤리나 졸리가 레드카펫에서 먼저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물론 컬러는 기네스 팰트로의 드레스와 다른 실버 톤이었지만.

레드카펫의 새로운 명가 엘리 사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네스 팰트로 다음으로 많이 회자된 드레스는 제니퍼 로페즈의 브론즈시어 드레스와 엠마 스톤의 애플그린 톤 세퀸 드레스였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드레스지만 드레스를 만든 디자이너는 동일 인물이다. 바로 시카고 출신의 디자이너 엘리 사브(Ellie Saab)의 작품.

미셸 오바마가 시카고의 병원에 근무할 때부터 즐겨 입었던 것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엘리 사브는 미셸이 영부인이 된 시기와 비슷하게 시카고를 벗어나 패션의 메카인 뉴욕 컬렉션에 당당히 입성해, 지금은 미국을 대표하는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로 급성장했다. 엘리 사브 역시 아직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미국에서는 향수 라인까지 론칭했을 정도로 시상식 드레스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을 위해 엘리 사브는 ‘전담반’을 설치해 시상식의 윤곽이 나오기도 전부터 가능성 높은 할리우드 스타들을 접촉해왔다는 후문이 전해질 정도다. 이처럼 브랜드의 급성장 이면에는 영부인 카드와 더불어 레드카펫의 ‘명가’로 자리매김한 것이 큰 동력이 됐다.

그 노력의 결과 엘리 사브는 올해 아카데미 레드카펫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물론 기네스 팰트로를 앞세운 랄프 & 루소에 많은 표를 빼앗기긴 했지만, 그래도 두 명의 베스트 드레서를 배출했으니 랄프 & 루소 못지않은 큰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자칫하면 제니퍼 로페즈의 짙은 피부색에 드레스 색감이 묻혀 존재감이 약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보석이 수놓인 멋진 드레스를 만들어내 큰 찬사를 받았다. 특히 뒤로 길게 늘어진 레이스 라인이 절묘하게 제니퍼 로페즈의 몸매를 살려내 뒤태가 더욱 인상 깊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거기에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엠마 스톤의 몸매가 드러나는 애플그린 롱 슬리브 칼럼 드레스 또한 빨강 머리와 대조를 이루며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드레스도 엘리 사브의 주특기인 보석을 한땀한땀 수놓은 것으로, 미국 드레스 장인도 유럽 못지않다는 것을 과시한 셈이다.

돌아온 천재, 존 갈리아노
올해 아카데미 레드카펫 승자 중 마지막 한 사람은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서 유대인 비하 발언으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풍운아 존 갈리아노. 그가 이번 시즌부터 프랑스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디자이너로 복귀해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서 그 새로운 시작의 신호탄을 쏘았다. 작년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케이트 블란쳇이 올해 시상자로 참여하면서 선택한 브랜드가 바로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 존 갈리아노가 디자이너로 영입되면서 브랜드 이름이 Maison Martin Margiela에서 Martin이 빠지고 Maison Margiela로 바뀌었다. 마치 Yves Saint Laurant이 Saint Laurent이 된 것처럼)의 드레스였던 것.

케이트 블란쳇은 오래전부터 시상식 드레스로 존 갈리아노의 디올 드레스를 즐겨 입었고 개인적으로도 존 갈리아노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기에, 그의 성공적인 복귀를 돕기 위해 공식석상에서 처음 메종 마르지엘라의 드레스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네스 팰트로와 제니퍼 로페즈의 드레스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옷발’ 좋기로 유명한 케이트 블란쳇이어서 무난한 스타트를 끊었다는 평이 많다.

또한 올해 시상식에는 미국판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도 참석했는데, 그 역시 패션계 천재의 복귀를 축하라도 하는 듯 메종 마르지엘라의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이외에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로 한국에서도 친숙한 옥타비아 스펜서가 입은 타다시 쇼지(Tadashi Shoji)의 드레스도 레드카펫의 단골손님이다. 뉴욕 컬렉션에서 우아한 실루엣과 레이스가 돋보이는 드레스 위주의 쇼를 선보이고 있는 디자이너로, 최근에는 판빙빙을 비롯한 중국 스타들이 선호하는 드레스로 중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또한 영국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을 비롯해 케이트 윈슬렛, 케이트 허드슨, 안젤리나 졸리 등 최고의 셀레브러티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드레스 브랜드 제니 팩햄(Jenny Packham) 역시 레드카펫 드레스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톱 디자이너이며, 웨딩드레스 브랜드로 유명한 디자이너 리모나 케베자(Remona Keveza)도 최근 들어 레드카펫 전쟁에서 자주 이름을 듣는 디자이너다.

이처럼 최근에는 드레스를 입은 할리우드 스타만큼이나 그들이 입은 드레스가 어떤 브랜드인지가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엔 드레스를 만든 디자이너의 존재는 업계 사람들이나 아는 비밀 아닌 비밀에 가까웠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SNS를 비롯한 개인 미디어가 위세를 떨치며 스타가 입는 드레스를 포함해 스타의 모든 것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여태껏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다른 각도를 통해 보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이기에, 패션과 관계된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이는 매우 기쁜 일이긴 하다.
Joel Kimbeck
뉴욕에서 활동하는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줄리아 로버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현재 ‘퍼투’를 이끌며 패션 광고를 만들고 있다. ‘레드 카펫’을 번역하고 ‘패션 뮤즈’를 펴냈으며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칼럼을 기고한다.

글 · 조엘 킴벡 | 사진 ·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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