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과거사 사죄 외면한 아베, 美의회 박수가 면죄부 될 수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30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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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끝내 한국이 기대했던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를 하지 않았다. 29일(현지 시간)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 나선 그는 과거사에 대해 “전후 일본은 앞선 대전(大戰)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안고 걸음을 시작했다”며 “(일본) 스스로의 행동이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고통을 안겨준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어야 할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인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밝히는 대신 아베는 “이런 점에 대한 (내) 생각은 역대 총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며 가볍게 넘겨버렸다.

관심의 초점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는 “분쟁 때 늘 상처받는 것은 여성이었다. 우리의 시대야말로 여성 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에둘러 말하는 데 그쳤다. 아베가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우물쩍 넘긴 것은 역사적인 무대에서 진솔하게 사과하기를 바랐던 국제사회의 기대를 또다시 저버린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아베의 이번 연설에 세계의 관심이 쏠린 이유는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2월 8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던 바로 그 자리에 전범국(戰犯國) 총리가 선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전날 미일(美日) 정상회담에서 아베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과거의 적(敵)이 견고한 동맹으로 역사적 전환”을 했다며 중국의 위협적 굴기(굴起)에 맞선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일본의 ‘적극적 평화 기여’ 정책이 동맹 강화의 동력이라고 강조했다. 미일 비전 공동성명에서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을 지지한다”고 밝혔을 정도다. 일본이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충분히 사과하기 전에 전범국가의 꼬리표를 떼고 세계 평화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는 것을 찬성할 수는 없다.

아베 총리는 이번 방미를 통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전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70년 전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을 꺾었던 미국이 이젠 일본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은 동북아 역학구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음을 드러낸다. 미일과 중국-러시아-북한의 대립 구도가 다시 심화돼 신(新)냉전 체제가 도래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는 마당이다. ‘과거사 프레임’에 갇혀 있던 한국 외교는 방향 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당장 외교 실패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만 해도 “아베 총리가 미 의회 연설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이를 관철하지 못해 외교력의 한계를 보여줬다. 이미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한 듯 외교부 당국자는 “아베 총리가 올바른 역사 인식을 표명하지 않는다면 아베 총리와 일본의 부담”이라며 미리부터 책임을 회피했다. 아베의 이번 방미에 대해 “미국이 세계에서 하는 역할을 일본이 지원하는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던 외교부의 판단력은 문제가 있다. 이런 외교부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국익에 기반을 둔 외교 전략을 세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로 내걸었던 박 대통령은 이제 한일관계가 한미관계에도 파장을 미치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국익 극대화의 관점에서 세계 질서 개편에 편승해 ‘강한 일본’으로 거듭나고 있고 중국도 최근 중일 정상회담에서 보여주듯 일본과의 충돌을 억제하는 실리 외교를 펴고 있다. 6월 미국을 방문하는 박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어떤 성과를 내놓을 수 있는지 외교안보팀의 통절한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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