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청년실업에… 명문대 나와도 워킹푸어 전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무너지는 한국의 중산층]중산층 진입-유지 왜 어렵나

새벽부터 일용직 찾아나선 중장년층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고령화, 자녀세대의 구직난까지 겹치면서 한국 중산층들은 과거와 다른 복합 위기를 맞고 있다. 18일 새벽 서울 구로구의 지하철 7호성 남구로역 인근에서 중장년층 남성 50여 명이 모여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새벽부터 일용직 찾아나선 중장년층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고령화, 자녀세대의 구직난까지 겹치면서 한국 중산층들은 과거와 다른 복합 위기를 맞고 있다. 18일 새벽 서울 구로구의 지하철 7호성 남구로역 인근에서 중장년층 남성 50여 명이 모여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서울의 유명 사립대 철학과를 나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박모 씨(39)는 2년째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시간당 5만 원 정도를 받고 주당 6시간을 강의하지만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120만 원 안팎. 태어난 지 10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대형마트의 캐셔(현금수납원)로 일하겠다는 아내를 간신히 설득해 아이를 돌보도록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아버지로부터 한 달에 100만 원가량을 지원받는 덕에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이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 곧 퇴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박 씨는 “전임교수 자리가 나지 않는 이상 세금을 떼고 연간 1000만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리는 생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며 “아버지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집안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지만 아버지 정도의 중산층 삶을 꿈꾸는 게 사치스럽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중산층의 붕괴는 자녀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가져도 적정한 수준의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이른바 ‘고학력 워킹푸어’가 급증한 탓이다. 중산층에서 이탈한 60대 부모 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가진 30대 자녀마저도 적정한 소득을 올리기가 힘들어지면서 중산층의 세대 상속이 단절되고 있는 것이다.

30대 중산층은 대졸 이상의 학력이 필요한 전문직 및 경영관리직과 기술직, 대학강사 등의 고학력 비정규직 등을 포함. 경제적 안정층은 소득분위가 4인 가족 원평균 소득 274만 원 초과. 자료: 신광영 중앙대 교수
○ 무너지는 중산층의 세대 상속

2001년 기준 50대 남성이 10년 뒤인 60대에도 정규직 직업을 유지하거나 고용주 계층으로 이동한 비율은 29.22%에 불과했다. 나머지 70.78%의 60대는 소득이 불안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산층에서 탈락한 60대와 중산층의 직업(고학력 비정규직 포함)을 가진 빈곤층 자녀(하위소득 40% 이하)가 있어 양 세대 모두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은 9.29%로 파악됐다. 2011년 기준 소득수준이 40% 이하인 계층은 4인 가정 기준 월평균 소득이 274만 원 이하다. 반면 60대 부모가 중산층 이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고 자녀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비율은 12.67%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중산층의 세대 상속이 단절되는 가장 큰 이유를 일자리에서 찾고 있다. 부모세대는 나이가 들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낮고 직장을 나와 자영업에 나서도 실패할 확률이 크다. 청년실업률도 지난달에 월간 기준으로 1999년 7월(11.5%) 이후 최대인 11.1%까지 치솟을 정도로 청년층 취업난은 점차 심해지고 있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중산층에서 몰락한 부모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고 공무원과 같은 안정적인 직업에 젊은층이 몰리다 보니 취업문이 더욱 좁아져 자녀 세대마저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늘어나는 고학력 워킹푸어

2006년 지방 국립대학의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방송국 입사를 꿈꾸던 조모 씨(35)는 요즘 결혼식장의 촬영 아르바이트로 모자라는 생활비를 마련한다. 번번이 방송국 입사시험에 낙방하다가 대학원까지 다녔지만 결국 원하는 직장 대신 소규모 영화제작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회사가 마땅한 투자자를 찾지 못하면서 월급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조 씨처럼 대졸 이상의 학력을 지녔지만 저소득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학력 워킹푸어가 지난 10년간 크게 늘면서 중산층 세대 상속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이번 조사에서 2011년 기준 정규직 중산층 직업을 가진 30대의 10.97%는 빈곤층으로 분류돼 정규직 중산층 직업군의 모든 세대 중에서 가장 높았다. 학원 강사나 비정규직 연구원, 예술계에 종사하는 감독이나 프리랜서 작가처럼 비정규직의 중산층 직업을 가진 이들의 빈곤율(4인 가족 기준 월평균 소득 274만 원 이하인 비율)도 24.13%로 30대 전체의 평균 빈곤율(18.21%)보다 높았다. 고학력 워킹푸어의 증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정규직 직장을 잡아도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1996년까지만 해도 양질의 일자리가 535만 개인 데 비해 대졸 노동력은 497만 명에 불과해 노동력의 공급이 수요를 채우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2010년에 이르면 양질의 일자리 수는 581만 명으로 거의 증가하지 않은 반면 대졸 노동력은 965만 명에 달해 400만 명이 넘는 초과 인력공급이 이뤄졌다. 이 400만 명 중 일부는 비정규직이나 소득이 낮은 직종에 머물면서 고학력 워킹푸어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국민들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를 계속 늘려 나가는 가운데 임금피크제와 사회안전망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믿을건 교육” vs “이젠 못믿어” ▼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해도 빈곤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학력 워킹푸어’가 늘어나고 있지만 한국의 중산층은 여전히 교육을 통해 자식 세대들에게 중산층 지위를 물려주려 하고 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 교육을 통해 중산층이 된 부모들이 자신의 경험을 자녀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중산층 형성과 재생산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부의 대물림 과정에 있어 미국 영국 스웨덴에 비해 부모의 소득이 미치는 영향은 작았지만 교육은 영국 다음으로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부의 대물림(세대 간 소득 이동)에서 교육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보면 영국이 49.6%로 가장 높았고 이어 한국(48.2%) 미국(44.7%) 스웨덴(40.7%) 순이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교육은 여전히 중산층 지위의 세습과 이탈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며 “다만 일자리가 줄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사교육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중산층 부모들은 소득의 상당 부분을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자녀의 사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에 최우선적으로 돈을 쓰다 보니 소득이 적어도 교육비는 줄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교육비가 초중고교 자녀를 둔 가구의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소득이 낮은 그룹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 하위소득의 20∼40% 가구는 소득의 11.5%를 교육비로 쓰는 데 비해 상위소득의 20∼40% 가구는 10.6% 정도를 쓰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교육에 투자를 해 자녀의 학력은 높아졌지만 질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과거보다 교육의 투자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한 34세 이하 직장인 중 고졸자 평균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비율이 1980년 2.4%에서 2011년 23.4%까지 올라가는 등 교육에 대한 투자가 노동시장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모는 삶의 질을 희생해 가며 사교육에 투자해 자녀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얻도록 했지만 자녀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들어서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교육 과정도, 노동시장도 다양화해 청년들이 단순히 교육수준보다는 경험과 관심사에 따라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성규 sunggyu@donga.com·정세진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