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장소 연도 미상’의 수십만장 사진들… 노숙작가가 ‘구원’을 찍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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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나는 카메라다/마빈 하이퍼만 글·박여진 옮김/292쪽·2만5000원·윌북

비비안 마이어가 1954년 미국 뉴욕 거리 한 상점의 쇼윈도 앞에서 촬영한 사진. 뷰파인더가 위쪽에 달려 피사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자세가 되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는 피사체의 거부감을 줄이는 장점을 가졌다. 윌북 제공
비비안 마이어가 1954년 미국 뉴욕 거리 한 상점의 쇼윈도 앞에서 촬영한 사진. 뷰파인더가 위쪽에 달려 피사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자세가 되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는 피사체의 거부감을 줄이는 장점을 가졌다. 윌북 제공
사람이 예술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예술이 사람을 선택한다. 예술은 절대로,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빼어난 성취에 이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 책은 그 사실에 대한 확인을 더한다. 제목의 비비안 마이어(1926∼2009)는 저자의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고갱이는 그가 찍은 사진이다. 원제는 ‘발견된 사진작가(A Photographer Found)’.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평생 독신으로 가정부나 간병인 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간 마이어는 25년 넘게 2안반사식 독일제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사진 수십만 장을 찍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 떠난 촬영자의 뜻과 무관하게 사진을 모아 책으로 펴낸 이는 마이어가 남긴 필름을 경매장에서 380달러에 구매한 부동산 중개업자 존 말루프다. 마이어는 끊임없이 이어나간 사진 작업 외에는 자신의 삶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큐레이터가 작성한 책 속 글은 그 고립된 생애를 되짚어 털어낸 희미한 흔적 조각들로 짜 맞춘 추측일 뿐이다.

마이어는 70대 이후 노숙 생활을 했다. 계절에 상관없이 늘 같은 스커트, 재킷, 모자, 신발 차림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쓰레기통에서 주운 책과 신문을 읽다가 지나는 행인에게 때때로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인화하지 않은 필름과 신문 스크랩 상자 수백 개를 임대 창고에 보관했지만 죽기 2년 전 임차료가 밀리자 경매로 처분됐다. 요양원에서 사망한 마이어의 유골은 딸기밭에 뿌려졌다.

글은 대충 훑어 넘겨도 그만이다. 사진에는 대부분 ‘장소 연도 미상’이라는 설명 아닌 설명이 붙었다. 사진에 집중하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찍은 것이 아니다.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이 사람, 카메라 통해 세상 바라보는 시간을 정말 사랑했구나.’ 찬찬히 뜯어보고 있자니 말없는 구원처럼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사람의 마음을 외면한 예술 공부, 그로 인해 얻은 그럴듯한 타이틀, 예술이 아닌 타이틀의 주변을 배회하는 말과 글, 그 모두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돌이키게 한다. 책에 슬며시 ‘사진작가’로 스스로를 소개한 말루프는 마이어의 상속권자를 찾아낸 변호사와 사진에 대한 권리를 놓고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마이어가 왜 누구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비비안 마이어:나는 카메라다#노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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