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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동아일보] ‘미달이’ 김성은 인생고백! 술과 우울증 벗어나 파격 연기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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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동아일보] ‘미달이’ 김성은 인생고백! 술과 우울증 벗어나 파격 연기 도전

우먼동아일보입력 2015-03-19 18:28수정 2015-03-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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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로 큰 인기를 모은 김성은. 하지만 그 후 그에게 미달이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다. 극 중 당돌하고 맹랑한 미달이와 그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 이후 아버지의 죽음까지 겪으며 방황의 정점을 찍은 그는 이제 다시 무인도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굳건한 연기자로 성장해 돌아왔다.

김성은(24)을 처음 만난 건 1999년, SBS 일일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 출연할 때였다. 이 드라마에서 미달이로 열연한 그는 당시 광고 수입만 연간 1억원이 넘는 슈퍼스타였다. 김성은의 가족이 그 무렵 경기 고양시 일산의 66㎡대 아파트를 장만하는 데도 그의 활동이 큰 보탬이 됐다. 인터뷰를 하러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김성은의 어머니 박선이(49) 씨는 “남편이 운영하던 건강식품 사업이 외환위기 때 부도에 직면해 시댁에 들어가 2년간 얹혀살았다”면서 “남편이 회사를 다시 일으키고 성은이도 많은 도움을 줘서 최근 이사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직접 만난 어린 김성은은 어른들을 종종 곤경에 빠뜨리는 당돌하고 맹랑한 미달이 캐릭터와는 많이 달랐다. 미달이처럼 재잘거리기보다 방 안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인사성과 붙임성이 좋은 귀여운 아이랄까.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김성은이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기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어머니가 만든 부침개를 먹고 가라며 조르던 모습이다.

그날, 다음에 와서 먹겠노라고 했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2월 17일 서울 홍익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그와 16년 만에 재회했다. 그사이 그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춘기 시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인해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해 충격을 던졌고, 성형수술로 외모 콤플렉스를 떨친 후 2013년 tvN 드라마 ‘감자별QR3’로 13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했지만 옛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한 터였다. 그런 그가 1월 중순 개봉한 영화 ‘꽃보다 처녀귀신’에서 파격적 노출 연기에 도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하기 위한 시도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개운치 않았다.
‘순풍산부인과’ 종영 후 부모 권유로 유학 떠나
정말 성인 연기자로 거듭나려고 강도 높은 노출 연기를 시도한 건가요.
큰 의미를 두진 않았어요. 제가 찍은 장면이 자극적이라고 생각지도 않고요. 엄마는 물론 엄마 주변의 지인들도 “너는 배우다. 배우니까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어요. 저도 작품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가장 예쁜 나이에 예쁜 모습으로 연기하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제가 맡은 역이 작품 속 비중은 작지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 마음에 들었어요. 순수한 면도 있고, 행복한 모습이 있고, 마음을 닫고 세월과 단절한 모습이 있죠. 남자친구가 꿈을 꾸는 장면에서 야한 신이 나오긴 하지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연기를 해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완성된 작품을 보고 흡족했나요.
직접 보니 민망하긴 하더라고요. 특히 고교 남자 동창들이 “영화 잘 봤다. 멋있더라”는 반응을 보일 땐 부끄러웠어요. “왜 봤니?” 그랬죠(웃음).

‘순풍산부인과’가 끝난 후 연기 공백기가 길어진 이유가 있나요.
엄마 말씀으로는 제가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대요. 성인도 하기 힘든 일인데 ‘순풍산부인과’가 방영되는 3년 내내 출연했거든요. 이후 한두 해는 학교생활에 충실하면서 간간이 연예 활동을 하다가 2002년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면서 작품을 안 했죠.

예전 인터뷰 당시 “학교에서 6학년 언니들이 인사 안 한다고 괴롭힌다”고 말했는데, 혹시 그 문제로 유학을 간 건 아닌가요.
제가 그랬나요? 호호. 기억이 안 나요. 왜냐면 평범한 아이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걸 겪어서 기억이 상당 부분 왜곡돼 있을 거고 정확하지 않을 거예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4교시가 끝나면 바로 일하러 갔던 기억밖에 없어요. 수업을 4교시까지 했는데 그건 무조건 다 들었어요. 학교를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엄마가 꼭 그렇게 스케줄을 잡았어요. 엄마와 아빠가 똑같이 기본적인 것과 인성 교육은 잘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셔서, 학원을 가지는 못했어도 책은 정말 많이 읽었어요. 부모님은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좋으니까 신문과 책을 많이 읽으라고 강조하셨어요.

어릴 때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회의가 들었나요.
그런 걸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시기였죠. 아이였으니까요. 지금은 촬영을 일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때는 연기가 가끔씩 힘든 놀이 같았어요. 추울 때도, 더울 때도, 피곤할 때도 해야 하는 놀이요. 지금은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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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유학을 왜 간 거죠.
부모님이 저를 유학 보내고 싶어하셨어요. 대신 나라, 도시, 학교는 제가 인터넷으로 찾아서 정했어요. 부모님은 경제적 지원만 해주셨어요. 뉴질랜드에도 처음에만 같이 가시고 이후 3년 동안 한 번도 오시지 않았어요.

유학 생활이 외롭지는 않았나요.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자립심을 키워주셔서 가족과 떨어진다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전혀 없었어요.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잘 지냈어요. 저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도 편했고, 자고 싶은 만큼 잘 수 있고 충분히 뛰어놀 수 있어서 좋았어요.
16년 만에 다시 만난 김성은은 여전히 앳돼 보이는 외모와 달리, 역경에 굴하지 않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대견한 배우로 성장해 있었다.

사춘기 시절을 동물원 원숭이로 만든 ‘미달이’
2002년 뉴질랜드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2004년 중반 귀국해 고양시 화정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유학 생활을 3년으로 끝낸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아빠가 하던 사업이 기복이 심했어요. 잘될 때는 남부럽지 않았는데 그 무렵에는 저를 지원해주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제가 거기서 돈을 많이 썼거든요. 학비만 1년에 3천만~4천만원이 들었고, 승마와 바이올린에 영어 교습까지 받았어요. 한 달에 2백만원 정도 드는 홈스테이를 1년 동안 했고요. 거기에 가디언 비용까지 합치면 한 달에 족히 4백만~5백만원은 들었을 거예요. 아빠가 그걸 3년간 대주시다가 더는 버티기 힘들어서 돌아오라고 한 거예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 사춘기가 오지 않았나요.
중1 때는 괜찮았는데 2~3학년 때 생각이 많아졌죠. 방황했다기보다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었어요. 어디 가서 나쁜 짓을 하진 않았어요. 제가 외동딸이니까 부모님을 실망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고, 사람들이 제 얼굴을 아는 것도 마음에 걸렸어요.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표출할 수 없으니까 글로 대신했어요. 엄마가 모르게 하려고 영어로 일기 쓰고, ‘싸이월드’에도 글을 올리곤 했죠. 힘겨운 심경이 담긴 글이 많은데 지금 보면 웃겨요.

그 무렵 ‘미달이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는데요.
사춘기였으니까 그 자체로도 힘든데 사람들이 저를 다 ‘미달이’로 알아보더라고요. 몸이 성숙해지고 자아가 생겨나는 시점이라 ‘나는 왜 태어났지? 내 정체성은 뭐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연기한 미달이 모습을 생각하며 제 성격을 지레 판단하고 말괄량이로 보는 게 불편했던 거죠. 활달한 성격이면 잘 대처했을 텐데 원체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서 더 힘들었을 거예요.

혹시 ‘왕따’를 당했나요.
그런 적은 없어요. 괜히 샘내고 질투하는 사람은 있었죠. 저를 보면 자기네들끼리 소곤거리고 비웃으면서 지나가니까요. 중·고등학교 시절은 짓궂을 때니까 저를 쫓아와서 찌르고 도망가는 아이도 있었어요. 동물원 원숭이였죠. 관심 자체가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사진 찍히지 않게 친구들이 제 등 뒤를 막아서서 보호해줬어요. 저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는 친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했죠.


아버지 떠나보낸 후 폐인처럼 살아
학업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독서 습관이 도움이 됐다. 뉴질랜드에서도 그는 주말마다 지역 도서관을 찾아 한국 소설을 읽고, 주 중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영서를 읽은 덕분에 귀국 후 학교 수업에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여름, 국립극장에서 상연한 ‘강아지똥’이라는 연극에 출연하면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작품도 정말 좋았지만 함께 출연한 선배님들이 삶에 대한 조언을 해주시고, 배우로서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도 알려주셔서 그 한 편의 동화가 제겐 어마어마한 대작으로 다가왔어요. 정말 뜻깊은 작품이었고 배우로 돌아가게 해준 터닝 포인트였죠.”

고2 때부터 연기 입시학원을 다닌 그는 1년 동안 연극과 뮤지컬을 합쳐 네 작품에 출연했다. 30 : 1의 경쟁률을 뚫고 동덕여대 연극영화과에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한 것도 그 경력 덕분이다. 그는 “영화와 드라마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생각하면 피가 뜨거워진다”면서 “무대에서 ‘신나게 놀기’ 위해 두세 달 동안 피와 땀을 흘리면서 완벽해질 때까지 연습하는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어서 좋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학 1학년 때 찾아온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예요. 충격이 컸죠. 아빠는 진짜 ‘딸바보’였어요.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셨어요. 제가 보기엔 지나치게 착해서 사업을 잘 못하신 것 같아요. 저를 지지해주던 기둥이 무너졌으니까 그 상실감을 어떤 걸로도 채울 수 없었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두세 달간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기도 했고요. 소주 두세 병을 안 마시면 잠을 못 잤어요. 거의 폐인처럼 살았죠. 그러다 문득 ‘아빠가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좋아하실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날 이후 삶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죠.”

이후 그는 살 길을 찾았지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연기를 하고 싶어도 소속사가 없다 보니 관련 정보를 알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영화와 연극 오디션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였다. 그는 이미지나 캐릭터가 자신과 맞겠다 싶은 작품이면 장르와 규모를 가리지 않고 오디션에 지원서를 보냈다. 결과는 모두 허사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들 방법을 고민했다.

“한동안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차라리 좀 더 공부해서 아이들을 가르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친한 선배가 ‘연기를 잘하니 좀 더 힘내라. 네 연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감동받아 생각을 고쳐먹었죠. ‘내가 브라운관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배우가 아닌 게 아니지. 이렇게 건강하니 뭐든지 할 수 있어’ 하고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그는 국내 화장품 회사에 입사해 상품 개발 업무를 하다 6개월 뒤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무역 회사로 옮겼다. 그의 영어 실력을 높이 산 회사에서는 무역업에 문외한인 그에게 이전 직장보다 훨씬 많은 봉급은 물론 수차례 해외 출장 기회를 제공하고, CEO 교육과정을 이수하도록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양한 만남을 통해 인맥을 넓히고 많이 배우고 오라”는 배려였다.

나이와 감성에 맞는 연기 생활을 하고 싶다
그럼에도 그는 6개월 뒤 회사를 나왔다. 입사 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매니저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인복이 있는 것 같다. 힘들 때마다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면서 “내게 아낌없이 지원해준 회사를 그만두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죄송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그 뒤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감자별QR3’와 tvN에서 방영 중인 자급자족 예능 프로그램 ‘그 시절 톱10-웰컴 투 두메산골 ’과 영화 ‘꽃보다 처녀귀신’을 촬영했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잘 모르겠어요.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서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아주 불쌍한 역도 해보고 싶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싸가지 없고 반항적인 캐릭터도 해보고 싶어요. 제가 눈을 차갑게 풀면 상당히 차가워 보이거든요.

지금 한번 풀어보시죠.
하하하. 지금은 웃겨서 잘 안 돼요. 원래 제가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잘 웃게 된 것 같아요. 제게는 새로운 다짐이었으니까요. 한 계단 더 올라가고 한층 더 성숙해졌다는 느낌이 들 때부터 많이 웃으려고 노력했어요. 많이 웃으면 웃을 일이 더 많이 생기더라고요. 화장품 회사를 다닐 때 사장님이 해주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이기는 사람은 계속 이겨. 지는 법을 몰라”였어요. 제 자신감을 키워주려고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거예요. 그 말씀 덕분에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게 됐어요. 물론 지금도 우울해질 때가 있고 감정 기복이 심하긴 해요. 그럼에도 저 밑바탕에는 긍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게 됐죠. 지금은 저에게 그런 깨달음이나 생각이 들 수 있었던 것 자체에 감사해요.

김성은은 인터뷰를 마치며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20대에도, 30대에도 그 나이에 맞는 얼굴과 감성으로 연기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내비쳤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그가 돌아서는 기자의 발걸음을 16년 전 그때처럼 또 멈춰 세웠다.
“예전에 못 먹은 부침개 꼭 드시러 오세요. 배추김치전 좋아하세요? 이제 저도 잘 부치는데…(웃음).”

글·김지영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 헤어·유호준(그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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