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한기흥]노태우 때처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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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흥 논설위원
한기흥 논설위원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은 우리 외교안보에 큰 부담이다. 다행히 미국이 차분히 대응하고 있지만 그의 자상(刺傷)이 치유돼도 한미관계엔 상흔이 남을 수 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과거사 공동책임 발언으로 양국관계에 물음표가 나오던 참이다. 한일관계는 최악이고 남북관계도 결빙이니 설상가상의 악재에 정부의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땐 숱한 위기를 헤쳐 온 과정을 복기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특히 노태우 정부 시절을 진지하게 돌아보면 좋겠다. 한국의 외교안보가 가장 창의적이고 생동감 넘쳤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을 과거에 13년간 모신 핵심 측근이었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경험과 노하우를 참고하기도 용이할 것이다.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동유럽 국가들과 잇달아 국교를 수립하고 소련(1990년 9월), 중국(1992년 8월)과의 수교로 대미를 맺은 북방외교는 냉전시대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의 새 지평을 열었다. 북한과도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분단 후 처음으로 공존공생을 실천에 옮기는 국면이 조성됐었다. 노 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5월 북한 군인 3명이 철원 부근 비무장지대를 침투했다가 총격전 끝에 사살된 사건이 있지만 6공화국은 북의 도발이 가장 적었던 때로 꼽힌다.

한미관계에서도 평시작전권 전환, 용산 주한 미군기지 이전 합의,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AFKN 채널 환수, 광주 미문화원 환수 등 한국의 자주성을 강화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특히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한반도에 배치된 미 전술핵무기들을 선제적으로 철수한 것과 북의 끈질긴 요구를 과감히 받아들여 1992년 팀스피릿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일시 중단한 것이 눈길을 끈다. 팀스피릿 중단은 북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핵사찰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한국 정부의 결정을 미국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다만 중단 발표(1992년 1월 7일) 13일 뒤 채택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은 북이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우리의 핵능력만 제약한 측면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과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 잘못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외교안보 면에선 상당히 진취적이었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6공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이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고 재량권을 준 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인 결과라고 말한다.

6공 이후 외교안보 정책은 유연성을 잃고 경직됐다. 북이 몰래 핵 개발을 하면서 도발을 일삼아 대응이 마땅치 않았다. 정권의 색깔에 따라 정책도 오락가락했다.

박 대통령은 통일과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실천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 눈에 띄는 성과는 없다. 북한과 일본에 대해 엄숙한 도덕주의를 내세우는 것만으론 교착 국면을 타개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워싱턴 스쿨’에 편중된 외교라인이 ‘대통령 말씀’을 받아쓰기 하듯 따르는 데 급급한 마당에 과연 창조적인 정책이 나올지도 의문이다. 한국의 외교안보에 관해 종합적인 설명을 들으려면 대통령 외에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도 나도니 당국자들이 더 분발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대북, 대외정책의 물꼬를 트는 선제적인 결단을 하되 외교안보 라인에 권한과 책임을 좀 더 주고 전면에서 약간 물러서면 어떨까 싶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노태우#마크 리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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