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위축에 경제 헛바퀴… 崔 “임금 올려야” 기업에 SOS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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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디플레 경보]

《 먼 미래나 다른 나라의 일처럼 여겨지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소비 위축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수출도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있고 가계소득이 줄어 물가마저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정부가 한국 경제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공식화한 배경에는 이처럼 경제 전반의 활력과 기대심리가 꺾이고 있다는 총체적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몇 년간의 흐름만 놓고 봐도 요즘 국내 경제는 경기 사이클의 변화에 따른 일시적인 침체에 빠졌다기보다 빙산에 부딪힌 배처럼 서서히 주저앉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4일 “우리 경제가 옆으로 횡보하는 답답한 움직임을 5, 6년째 지속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번 위기가 한두 가지 변수에 따른 이례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 내수 수출 물가… 가라앉는 경제지표

직장인 김모 씨(40)는 월 소득이 500만 원가량이지만 가처분소득은 사실상 100만 원 남짓밖에 안 된다. 1억 원이 넘는 전세금 대출 상환에 월 150만 원이 들어가고 각종 연금보험, 정기적금에도 100만 원 이상의 비교적 많은 돈을 붓는다. 관리비, 교육비 등 필수 생계비를 제외하면 여윳돈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김 씨는 “빚 갚느라 바쁜 데다 은퇴 이후의 삶도 대비해야 하니 항상 생활이 빠듯하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 경제를 둘러싼 제반 여건을 보면 설령 유가 하락이라는 외부 요인이 사라진다고 해도 디플레이션 우려를 완전히 걷어내기는 불가능한 처지다. 구조적으로 가계가 소비를 늘릴 수 없어 물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면이기 때문이다.

우선 미래에 대한 불안은 가계의 지갑을 닫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노후 불안과 조기 퇴직에 대한 우려 때문에 설령 돈이 있어도 소비보다는 저축을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가계가 앞으로도 경기가 나쁠 것으로 예상하는 데다 우리나라는 연금 등 복지체계도 잘 갖춰져 있지 않다”며 “소비를 늘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비의 원천이 되는 가계소득과 자산가치도 정체되고 있다. 젊은층은 근로소득이 늘지 않고 50대 이상 중년층과 고령자들은 대출받아 산 주택 값이 오르지 않아 답답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가구주가 39세 이하인 가구의 지난해 월평균 소득은 434만 원으로 전년보다 0.7% 늘어나는 데 그쳤다. 2003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이다. 최근에는 삼성그룹마저 주요 계열사 임금을 동결하는 등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그나마 사정이 나은 대기업 근로자들의 소득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공무원 장모 씨(39)는 6년 전 서울 강북지역에 2억 원을 대출받아 5억 원 상당의 아파트를 매입했지만 집값은 오히려 조금씩 떨어졌다. 그는 대출이자와 자녀 학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전세를 놓고 가족과 함께 부모님 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시장의 거래는 늘었지만 매매 가격은 여전히 옆걸음을 치고 있다. 앞으로는 집값이 쉽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시장 전반에 확산된 탓이다. 가계자산의 70%를 넘는 부동산 가격이 정체되고 있는 반면 전셋값 인상과 생계비 마련을 위한 부채만 늘어남에 따라 장 씨처럼 소비를 줄이는 가계가 적지 않다.

그나마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수출도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1월 수출은 1년 전보다 10% 급감하며 5년여 만에 하락 폭이 가장 컸다. 수출 기업들의 채산성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직원들의 일자리도 위협받고 있다.

○ 정부, “가계 부채보다 디플레이션 대응이 우선”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두 차례 기준금리를 내리고 부동산 대출 규제를 완화하는 등 단기 부양책을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이는 세월호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는 시기와 맞물리며 경기 반등이 어느 정도 현실화하는 듯했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는 ‘반짝’ 회복에 그쳤고 지난해 말 소비심리는 세월호 사태 직후보다도 나쁜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흐름은 이달 초 발표된 산업생산 지표 악화로 이어졌다.

정권 출범 2년간 이렇다 할 경제적 성과를 내지 못한 정부도 다급해진 분위기가 역력하다. 국정과제에 한창 속도를 내야 할 집권 3년 차에 도리어 디플레이션 진입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실제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당국자는 “사실 지금은 가계부채 관리보다 재정 통화 정책을 총동원한 저물가 저성장 탈출이 더 시급한 국면”이라며 “디플레이션이 현실화하면 우리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 부총리가 이날 이례적으로 임금 인상을 기업들에 독려하고 나선 것도 정부의 기존 정책수단만으로는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민간의 도움을 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해서는 예단을 피하고 있지만 현 경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렇다 할 대내외 충격이 없었는데도 경제주체의 불안심리는 오히려 커졌다”며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쪽으로 한 걸음 더 간 것은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가까운 미래에 디플레이션이 올 거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경제 활력이 서서히 가라앉는다는 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 / 세종=김준일 기자
#디플레#한국#소비 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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