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여자 대통령이라서…”라는 참 불편한 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5일 21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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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여성대통령’ 대선 구호, 2년 만에 “여성이니까”로 전락
“여성대통령 시기상조” 소리까지
남자라면 카리스마적 리더십도 여성리더는 ‘공포의 측천무후’
정치 외면은 여자의 실패공식, 남자들에게 익숙한 ‘남자語’로
위기극복 리더십 보여줄 때다

박근혜 대통령과 나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여성이니까’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점일 거다. 한때 나는 ‘여성 칼럼’이라고 낙인찍히기 싫어 여성이나 가정 문제는 일부러 피한 적도 있다. 여자라서 차별받는 것도 원치 않되 혜택받는 건 더 원치 않는 자칭 비(非)페미니스트다.

요즘 슬슬 나오는 “대통령이 여자라서…” 소리는 그래서 더욱 불편하다. 주로 남자들이 하는 말인데 대통령 지지율이 30%로 떨어졌다는 지난주 갤럽 발표에서도 유독 남자들 평가가 박했다. 대통령이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을 내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배신 트라우마에서 나온 ‘믿을맨 중독’으로 여겼지 남녀 차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여자라서 그렇다는 남자들의 지적은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여자다 보니…삼성동 시절에도 그 비서관들 빼고는 집에 사람들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화장 안 한 얼굴을 보여주기도 그렇고, 올림머리 하는 데도 시간 많이 걸리지 않겠나.”

‘불통’ 문제를 풀지 못하는 이유도 여자에서 찾는 남자들이 많다. “원로나 의원들 초청해 폭탄주 돌리면 내 편도 되고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다. 여자 대통령의 한계다.”

심지어 세월호 ‘7시간’과 “대통령이 경내에 있으면 어디든지 대통령 집무실”이라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발언을 놓고도 대통령이 여자여서 터진 문제라고 했다. “정위치 지키기가 조직 지도자의 첫째 덕목이라는 걸 대통령은 모르는 모양이다. 군대를 안 가서 그런가?”

2012년 대선 직후 박근혜를 찍은 투표자들에게 선택 이유를 물었더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어서’가 ‘공약·정책’과 나란히 2위라는 게 갤럽 조사 결과였다. 첫 번째 이유는 ‘약속과 신뢰’다. 그 약속과 신뢰에 너무 매달리면 독선과 불통이 된다. 지금 대통령이 딱 그 짝이다.

안타깝게도 남자라면 카리스마적, 권위적으로 평가받는 리더십이 여자한테 붙으면 마초적, 독재적 ‘공포 리더십’으로 평가절하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당나라 황제들이 엄두도 못 낸 균전제 등의 개혁을 해내고도 잔인무도한 악녀로 기억되는 측천무후가 대표적이다.

지난 대선 직전엔 “인도의 인디라 간디,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총리 등 대통령궁에서 자라 아버지에게 정치를 배운 여성 리더는 남성적 리더십으로 철권통치하다 갈등을 일으키고 실패했다”는 글이 오마이뉴스에 실리기도 했다. “부토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정책 결정은 모두 비서관에 의해 이루어지고 중책은 모두 아첨꾼에게 돌아갔고…”라는 노무현 정부 때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의 글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물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박 대통령을 일반적인 잣대로 재단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국민이 염증을 내는 현재의 박근혜 스타일이 여성 리더에게 흔히 나타나는 문제라는 사실엔 모골이 송연해진다. 자신이 리더라는 현실을 잊고 혼자 일개미처럼 일한다든가, 비공식 권력 네트워크에 안 낀다든가, 남들이 좋아할 만한 여성성을 절대 안 드러내는 건 여자들의 실패 공식이다.

특히 영어보다 중요한 ‘남자어(語)’에 무지한 점은 치명적이다. 명색이 장관이 문고리 3인방을 통해 보고서를 전하고 지시를 받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거늘 그들보고 “대면보고가 필요하세요?”라니. 그러고도 장관들의 분발을 바란다면 대통령의 욕심이 과해 보인다.

대통령이 실패하면 우리나라의 골든타임이 날아가 나의 노후도 암울해질 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이 앞으로 100년쯤 ‘박근혜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조직의 장(長)은 못 맡을 공산도 없지 않다.

그래서 바라건대 박 대통령은 여성리더십 연구자들이 피땀 흘려 밝혀낸 문제점이라도 고쳐주면 고맙겠다. 만기친람이라는 완벽주의를 버리고 일을 내각에 과감히 위임하는 것이다. 경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게 빠져들면 금단현상이 생긴다”고 대통령이 말했지만, 3인방 없다고 해서 대통령직 수행을 못할 리 없다. 그까짓 대면보고, 어차피 세금으로 내는 모임과 식사, 남자 대통령은 다 해왔다는데 여자 대통령이라고 못할 게 뭔가.

2006년 대통령은 ‘여자니까 위기관리에 약할 것’이라는 건 편견이라며 “나는 평생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이 대통령의 위기상황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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