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는 미덕 아닌 죄책감”… 덜 쓰고 덜 입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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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시대, 달라진 소비]<中> 과시소비서 제로소비로


이진애(가명·59) 씨는 10년째 A백화점에서 연간 3000만∼4000만 원을 소비해 이 백화점의 우수 고객이었다. 그러나 올해 초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언’했다.

“백화점 쇼핑을 끊겠다.”

그는 가급적 백화점 출입을 줄이고, 옷은 필요하면 아웃렛에서 사며 비싼 물건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자산가치 하락에 대한 상실감이 영향을 줬다. 체감상 디플레이션이 닥친 셈이다.

이 씨는 “금리가 너무 낮아 이자소득은 줄고, 펀드도 줄고, 부동산 가치도 떨어지니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만 든다”며 “결혼한 자녀들에게 경제적 지원도 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뭘 샀는가’가 아닌 ‘어떻게 아낄까, 어디 가면 쌀까’를 주로 얘기한다”고 말했다.

○ 소비를 멀리하는 소비자


정부가 올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전망하는 가운데 소비심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소매지출 증가율은 1.6%에 불과했다.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마저 얼어붙어 소비시장에도 저(低)성장에 적응해야 하는 ‘뉴 노멀(New Normal·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경제적 기준)’ 시대가 왔다는 전망이 잇따른다.

본보와 엠브레인 서베이24가 이달 13일 20∼59세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5%만이 올해 씀씀이를 전년보다 늘리겠다고 답했다. 44.9%는 줄이겠다고 답했고 비슷하게 유지하겠다는 응답도 49.6%에 달했다.

여윳돈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도 71.5%가 소비보다 저축을 택했다. 소비를 택한 사람은 6.9%였다. 지난해 충동구매를 얼마나 했느냐는 질문에 전년(2013년)보다 줄었다는 대답이 37.2%, 비슷하다는 대답이 40.0%를 차지했다.

소비 위축이 장기화하자 유통업계는 일본처럼 ‘소비를 멀리하는 소비자’가 한국에도 등장한 게 아닌지 경계하고 있다. 일본의 장기 불황기(1991∼2001년)에 10대 시절을 보낸 ‘혐(嫌)소비 세대’는 소득이 충분해도 소비에 좀처럼 나서지 않아 일본이 장기 불황을 극복하는 데 최대의 적으로 불렸다. 지금처럼 국내 백화점들이 세일을 해도 손님이 몰리지 않는 모습은 일본의 장기 불황 초기였던 1990년대 초와 닮았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경제 전반이 ‘축소 지향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가계의 포트폴리오가 조정되고 소비 규모도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순서를 밟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국내 출판계에서는 일본에서 출간됐던 ‘소비사회 탈출기’ ‘소비를 그만두다’ 등의 서적이 번역돼 출간되고 있다. 일정 기간 소비를 하지 않는 ‘소비 파업’의 경험담이 주로 담겼다.

○ “백화점 정가 신상품 사면 바보”


올해로 직장생활 4년 차인 정상환 씨(30)는 오랫동안 꿈꾸던 첫 차 구입을 포기했다. 집주인에게서 올 5월에 만료되는 전셋집 보증금을 2000만 원 정도 올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당장 차를 구입하려 모아둔 돈을 은행에 묶어 뒀다. 취업 후 매년 두 번씩 다녀오던 해외여행부터 끊었다. 정 씨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저축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는 이유는 세대별로 다른 특징을 보인다.

20, 30대는 취업난, 전월세 상승, 미래에 대한 불안감 확산 등이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펴낸 ‘연령별 소비성향의 변화와 거시 경제적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중장년층은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때문에, 50, 60대는 급격한 고령화로 인한 노후 준비 때문에 소비지출을 줄이는 점에 주목했다.

사치 소비가 더는 ‘쿨’한 소비 행태로 여겨지지 않는 점도 한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는 데 영향을 준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세일이나 할인쿠폰, 상품권 증정 행사 없이 그냥 백화점에서 정가 신상품을 샀다고 하면 ‘바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한모 씨(36)는 “백화점에서 옷을 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최근엔 서울 중구 신당동 광희시장에서 여우털로 된 조끼를 구입했는데 30만 원도 채 하지 않았다. 실속 있는 쇼핑을 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 ‘제로 소비’ 시대 살아남는 법


한국의 소비시장은 1980년대 산업화와 1990년대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생존을 위한 소비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변모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소비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소비를 단순히 ‘생존을 위한 지출’로만 보는 경우가 늘었다.

직장인 김모 씨(34)는 “과거에 비해 소비가 주는 만족이 줄어들고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진다”며 “좋은 물건을 사도 그때뿐이고, 명품도 유행이 있어서 굳이 힘들게 번 돈을 그런 데 소비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소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심어 줘야 ‘제로 소비’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영학)는 “결국 새로운 틈새시장을 여는 전략이 필요하다. 가격 할인을 하더라도 ‘싼 가격→높은 가치→스마트한 소비’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며 “그동안 유통업체들이 소비자에게 보이지 않게 가했던 불합리한 유통 비용을 줄이는 노력도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염희진 salthj@donga.com·김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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