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보듬듯 지치고 슬픈 삶 위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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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만에 3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낸 김사인 시인
폐지 줍는 할머니, 취업난 제자… ‘너무 슬퍼 싣고 싶지 않은 시’ 담아
느린 말투로 詩전문 팟캐스트 진행 “시 대중화 매개 역할 하고 싶어요”

《 김사인 시인(59)은 지난 1년 내내 어린 당나귀를 곁에 두고 살았다. 불현듯 찾아온 당나귀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시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더 선명해졌다. 9일 서울 세종로에서 만난 시인은 당나귀를 이렇게 소개했다. “작은 몸으로 일만 하는 당나귀는 고집 세고 지저분하고 욕심이 많아요. 한편 천진난만하고 철부지입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리면 시어 당나귀는 이국적이면서 애조의 정서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애물 덩어리가 옆에서 떠나지 않으니까 버릴 수도 없고 견뎌내면서 데리고 다녀야겠구나 했어요.” 》

김사인 시인은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건네며 시집 면지에 “고요로 깊어지소서”라고 적었다. “우리 삶도 사회도 너무 바쁘고
 정신없고 경황이 없으니 고요란 말이 생소할 지경입니다. 단어라도 한 번 마주쳐 보십사 하고 덕담 삼아 적었습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사인 시인은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건네며 시집 면지에 “고요로 깊어지소서”라고 적었다. “우리 삶도 사회도 너무 바쁘고 정신없고 경황이 없으니 고요란 말이 생소할 지경입니다. 단어라도 한 번 마주쳐 보십사 하고 덕담 삼아 적었습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 시인은 최근 세 번째 시집을 출간하며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라고 이름 붙였다. ‘가만히 좋아하는’(2006년) 이후 9년 만에 낸 시집이다. 정작 이 시집에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란 시도, 구절도 없다. 시인은 “애물 덩어리 당나귀를 내가 평생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또 슬펐다. 그 생각만 하면 정말 슬프고 착잡한데, 그런 마음이 시집 바닥에 깔려 있다”고 했다.

시인은 “시집에 넣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픈 시”들을 골라줬다.

“기억 못하겠지요 그대도 나도/함께한 이 낯설고 짧은 시간을./두고 온 별들도 우리를 기억 못할 거예요./돌아갈 차표는 구할 수 있을까요 이 둔해진 몸으로./부연 하늘 너머 기다릴 어느 별의 시간이 나는 무서워요./어떤가요 당신은.”(은하통신―에스컬레이터에서 중)

“바쁘게 허덕거리며 살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만히 서 있으면 이상한 고요가 찾아와요. 그럴 때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이들인가. 아후∼ 정말로 막막할 때가 있어요.”

시인은 지구별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가만히 안으며 위로한다. 시 ‘바짝 붙어서다’에선 팔순의 폐지 줍는 할머니가 골목에서 승용차를 마주쳐 바짝 벽에 붙어 서자 “구겨졌던 종이” 같다며 “목이 멘다”면서 함께 운다. 시 ‘졸업’에선 취업난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건투를 빈다. “학자금 융자 없애는 마법 알바 시급 올리는 마법 오르는 보증금 막는 마법을 익히거라.”

보릿고개를 함께 견뎌낸 동년배에겐 시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를 들려준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밤마다 오줌을 쌌네 죽고 싶었네./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시인의 말은 느려서 받아 적기가 참 편했다. 주변에선 그를 두고 “느림의 대가”라 부르기도 했다. 시인은 ‘달팽이’에서 영원한 시간 앞에서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느리다는 말이 흉이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약간의 나무람 투도 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열이면 아홉은 느리다고 해요. 내겐 최적화된 속도니 자연스러워요. 여기서 더 빨라지면 시도 삶도 날림이 돼 버립니다. 달팽이란 시도 느림에 대한 핑계로 갖다 붙인 것도 있어요. 하하.”

시인은 지난해 12월부터 특유의 느린 말투로 시 전문 팟캐스트 ‘시시(詩詩)한 다방’을 진행 중이다. 그는 “시에는 애쓴 말, 산 말, 힘 있는 말이 담겨 있다. 그 좋음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워 조금이라도 시 대중화의 매개 노릇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를 옷 입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옷도 입어봐야 진짜 가치를 알듯 그저 눈으로 산문 읽듯 독해하면 읽는 재미가 떨어지거든요.”

시인과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부모가 정성으로 마련해 준 옷을 입은 듯 뭉클하고 황홀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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