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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생’ 꿈꾸지만… 위로 오를수록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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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생’ 꿈꾸지만… 위로 오를수록 전쟁터

곽도영기자 , 조종엽기자 입력 2014-12-26 03:00수정 2014-12-26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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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의 화이트칼라]직장 관리자급 정신건강 위험수위 《 실적 깎이는 것, 승급 못하는 것, 그래서 도태되고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 무섭다. 돈만 아니면, 자식만 아니면 여기 있고 싶지 않다. -임원급 직원

그 상사가 부르면 몰래 소형 녹음기를 켠다. 끝없이 이어지는 폭언과 애매한 업무 지시를 모두 녹음한다. 나중에 녹음된 내용을 혼자 들으며 ‘내가 왜 이렇게 살지’라고 생각한다. 왜, 언제부터 녹음을 시작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30대 후반 직원

야근과 특근만 반복될 뿐 주말이 없다. 월요일 오전까지 보내라던 자료를 주말 내내 밤새워 해놨는데 막상 월요일이 되면 일언반구 말이 없다. 가끔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공황장애 증세로 진단돼 약물 치료를 받는다. -30대 후반 직원 》

이들은 모두 취업준비생들이 선망하는 국내 최고의 기업 삼성전자를 다닌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이 있다. 정기 건강검진 등 사원 헬스케어를 제공해온 이 회사가 임직원들의 심리적 건강까지 담보하기 위해 2012년 신설한 곳이다.

이곳을 찾은 임직원들의 얼굴은 엘리트 화이트칼라의 모습과는 달랐다. 몇 시간이고 말이 없거나 울거나 욕설을 퍼붓는 이도 있었다.

○ 엘리트 화이트칼라의 그림자

14일 기자와 만난 김주영(가명·여) 씨는 사내 정신건강의학과 클리닉의 존재를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본사 안에서야 ‘쉬쉬’ 하는 일이죠. 오히려 지인들이 ‘너희 회사에는 정신상담센터가 있다며? 좀 이상해 보이면 불러서 상담 좀 받아보자고 한다며?’라고 하는데, 제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쎄’했습니다.” 김 씨는 클리닉을 찾은 직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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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칼라 근로자와 다를 바 없이 이 시대의 화이트칼라는 치열한 생존 경쟁 아래 위협받고 있다.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일류 대기업 직장인, 공기업 직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올해 대한직업환경의학회 소속 연구원인 김인아 연세대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업무 스트레스 등 ‘산업재해로 인한 자살’로 인정해 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한 156명 중 가장 많은 44명(28%)이 ‘관리자’였다.

화이트칼라들이 말하는 회사는 ‘서로를 밟기 위해 혈안이 된’ 전쟁터였다.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모인 곳에서 ‘평판 관리’ ‘내부 영업’ ‘라인 타기’는 경쟁 종목처럼 되어 목을 조여 왔다. 삼성전자 인사 평가에서 단위 팀원 중 10%는 무조건 최하점인 D를 받게 돼 있다. D가 떨어지는 순간 똑같이 입사한 동기들보다 승격은 늦춰지고 ‘출세’는 영영 끝이다.

“평가 포인트와 승격은 돈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평생 경쟁만 하고 결국 꼭대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렇다 보니 상사가 평가하는 것들에 따라 자기 삶의 가치를 매기게 되는 거죠.” 김 씨의 말이다. 그 역시 ‘라인’을 만들려던 상사에게 응하지 않다가 결국 승격이 뒤처졌다. 자신의 험담까지 전해 들은 끝에 상담실을 찾았다.

금융계 증권 투자 엘리트들도 매일이 살얼음판이긴 마찬가지다. ‘장’이 열려 있는 동안 트레이더(주식, 외환, 채권 등을 거래하는 투자자)들은 하루 종일 ‘미친 사람처럼’ 욕을 하며 일하거나 점심도 앉은 자리에서 때우며 눈앞의 모니터를 좇는다. 해외 동향 하나를 놓쳐도 하루아침에 수억 원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의 한 투자회사에서 근무하는 박모 씨(29)는 “모 대기업 자산운용은 주식 담당 매니저 한 명이 굴리는 돈이 수천억 원”이라며 “한국 주식시장을 닫아도 외국 장이 열리니까 자기가 맡고 있는 관련주가 있으면 밤낮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니 사람이 피폐해진다”고 말했다.

○ 아버지들이 위험하다

회사 내에서 어렵사리 관리자 자리까지 올라간 40, 50대 화이트칼라는 이후 커리어가 좌절되거나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스스로 무너지기 쉽다. 공기업 탐사 과장이었던 A 씨(사망 당시 40세)는 2011년 6월 스스로 목숨을 끊기 2년 전, 동료들 사이에서 기피 부서였던 중동탐사팀으로 배정됐다. 열악한 팀에서 밤새워 일하며 버텼지만 팀장마저 팀에서 나가버린 뒤 불면증과 불안, 망상 증상을 보였다. 회사 동료에겐 “사표 쓰고 싶다”고 하면서도 아내에겐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A 씨는 자살 한 달 전부터 휴일에도 방에 혼자 앉아 있었고 결국 2011년 6월 2일 중동 출장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진하 연세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에 따르면 2008년 세계 경제위기와 경기침체,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던 시기부터 관리자 가운데 자살자가 급증했다. 2007년에는 인구 10만 명당 관리자 자살자 수가 3.7명에 그쳤으나 이듬해인 2008년 20.9명, 2009년 32.4명으로 크게 늘었다.

책임 소관이 넓어지고 그만큼 회사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중견급 이상 관리직은 회사의 감사를 받거나 사생활을 조사당하는 것 자체가 우울증이나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 증권업계 대기업에서 마스터 PB(자산관리자)로 일해 온 B 씨(44·여)는 2012년 사생활 문제를 명목으로 본사로 호출돼 감사인에게 조사를 받았다. 업무와 무관한 사생활 문제였음에도 이틀에 걸친 집중 조사는 B 씨에게 자괴감과 수치심, 커리어 단절에 대한 공포를 유발했다. B 씨는 우울장애 진단을 받고 산업재해 피해자로 인정됐다.

곽도영 now@donga.com·조종엽 기자
#화이트칼라#자살#정신건강#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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