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보다 콩”… 라울의 실용주의, 53년 닫힌 美빗장 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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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쿠바 국교 정상화]
2008년 형에게 권력 넘겨받은후 소유권 도입-외국인 투자개방 등
시장경제 개혁개방 꾸준히 추진… 금수조치 해제까진 한고비 더 남아

“쿠바와 미국은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우리는 문명화된 방법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83)이 국영TV 생중계를 통해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특별성명으로 발표하는 동안 쿠바는 환희에 휩싸였다. 성당들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들뜬 사람들이 거리로 달려 나와 얼싸안으며 터뜨리는 환호성이 수도 아바나에 울려 퍼졌다. 수업을 중단한 학교에서도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수십 년의 고립으로 지쳐 있던 쿠바에 이번 발표는 오랜 가뭄에 쏟아진 단비와 같았다.

형 피델 카스트로의 시대에서 단절돼 오랫동안 악연으로 이어져 왔던 미국과의 관계는 동생 라울의 시대에서 해빙을 맞았다.

○ 미국 신뢰 얻은 라울의 뚝심 개혁

2008년 병으로 쓰러진 형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라울 의장은 집권 첫날부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의장 취임 연설에서 국유산업의 비효율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위로부터의 쿠바 개혁개방’ 노선을 선언했다.

이후 6년 동안 라울 의장은 시장경제 체제를 꾸준하게 도입하고 정치범을 잇달아 석방하는 등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개혁 행보를 뚝심 있게 밀고 왔다.

2009년 대규모 정부조직 개편을 단행해 개혁의 걸림돌이 됐던 막강한 ‘형님 사단’을 축출하고 개혁 성향의 인물들을 중용했다. 그 뒤에도 식량배급제 및 정부 보조금의 점진적 축소, 자영업자 육성, 주택 및 중고 자동차 매매 허용, 자본주의식 소유권 도입, 부정부패 척결 등 굵직굵직한 개혁을 주도했다. 2013년엔 해외여행 허가 제도를 없앴으며 2014년엔 신외국인 투자법을 도입해 해외로 망명한 쿠바인의 투자까지 허용하는 등 개방에도 박차를 가했다.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창궐하자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256명의 의료진을 파견해 미국의 찬사를 받았다.

이런 노력 끝에 쿠바는 미국의 신뢰를 얻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17일 성명에서 “쿠바를 붕괴로 몰아가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쿠바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쿠바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고 밝혔다.

○ 피델 카스트로와 미국의 악연

이번 결정으로 미국과 쿠바의 과거 악연이 모두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1962년 만들어진 미국의 대(對)쿠바 금수 조치는 미 의회에서 법을 개정해야 풀리게 된다. 양국 관계 정상화로 쿠바 경제 파탄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금수조치도 해제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쿠바의 악연은 1959년 피델 전 의장이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미국계 설탕 및 석유회사들을 국유화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은 1961년 국교를 단절했고 그해 4월 쿠바 망명자로 피델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피그스 만 침공을 단행했으나 실패했다. 미국이 피델 전 의장을 암살하기 위해 집권 48년 동안 638번의 암살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는 보고서가 나올 정도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 과정에서 쿠바 경제는 파탄이 났고 과거 50년 동안 거의 200만 명이 미국으로 탈출했다.

양국의 수교는 미국의 쿠바 사회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 쿠바 인구는 1100여만 명에 불과하지만 미국에 사는 쿠바 난민은 2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대부분은 쿠바에서 145km 떨어진 플로리다에 살고 있다. 이들이 고국에 해마다 보내는 돈은 20억 달러가 넘는다. 망명자 사회 일각에선 관계 정상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몇 달 전 한 대학에서 조사한 결과 쿠바 이민자의 68%가 외교관계 복원에 찬성했고 젊은 층은 90%가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이번 결정으로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의 야시엘 푸이그 선수처럼 우수한 쿠바 인재들이 앞으론 더이상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국 쿠바 국교 정상화#라울 실용주의#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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