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50> 풀눈꽃눈 뜨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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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눈꽃눈 뜨니
―이향지(1942∼)

배가 고프다. 땅거미가 가장 먼저 바위틈에서 기어 나온다. 엄동 직전 폭설에 떠밀린 냉동사마귀가 땅거미의 밥이다. 깊은 눈 속에 자연 저장되어 있던 냉동메뚜기 냉동여치가 땅거미의 밥이다. 풀눈꽃눈 뜨니, 깡총거미도 배가 고프다. 모두가 전광석화처럼 걸음이 빠르다. 풀눈꽃눈 뜨니, 모두가 먹을 것을 찾아서 동분서주한다. 뱀은 먹이를 먹기 전에 사랑부터 한다. 풀눈꽃눈 뜨니, 몸이 몸을 남기려는 몸부림.

쑥 이파리가 새끼손가락을 펴기도 전에 칼날이 들어온다. 쑥쑥 자라는 쑥도 배가 고프다. 풀눈꽃눈 뜨니, 사람들도 들판을 헤맨다. 냉이는 얼음 속에서 꽃봉오리를 만든다. 냉이들은 잠도 안 자고 꽃대를 밀어 올린다. 냉이들은 납작 엎드려서 뿌리를 내린다. 풀눈꽃눈 뜨니, 사람과 풀들의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가 실린 ‘햇살통조림’은 이향지 선생이 12년 만에 낸 시집이다. ‘맨발 맨손 맨머리로 흙과 함께해 온 말들’이란다. 몸으로 겪은 ‘아름답지만 자비를 모르는’ 자연의 안팎을 온 감각으로 잡아채 밀도 있는 시어로 형상화한 시편들에 갸륵한 생명에 대한 경의와 경이가 담겨 있다.

이제 엄동은 지났는가. 봄의 전령사처럼 ‘풀눈꽃눈 뜨니’, 그 기척에 하나둘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땅거미가 가장 먼저 바위틈에서 기어 나온’단다. 겨울잠에서 깬 동물이 제일 먼저 느끼는 건 배고픔일 테다. ‘엄동 직전 폭설에 떠밀린 냉동사마귀’, ‘깊은 눈 속에 자연 저장되어 있던 냉동메뚜기 냉동여치가 땅거미의 밥이’란다. 시인의 놀라운 관찰력 덕분에 놀라운 장면이 눈에 선하게 펼쳐진다. ‘깡총거미도 배가 고프’단다. ‘풀눈꽃눈 뜨니, 모두가 먹을 것을 찾아서 동분서주한’단다. 아직 얼음이 안 풀린 곳도 있을 봄의 초입. 조금만 더 잠의 마비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인들 없을까만, 빈약한 먹이를 먼저 취하는 몸만이 살아남을 테다. ‘풀눈꽃눈 뜨니’ 벌어지는 생명체들의 각축전을 앞 연에서는 저속촬영 기법으로 점점 빠르게 운동감을 증진시키며, 뒤 연에서는 고속촬영 기법으로 냉이가 ‘얼음 속에서 꽃봉오리를 내미는’ 장면같이 세밀하게 보여준다.

겨울이 한참 남았다. 요즘 어찌나 추운지 날씨에 눈을 흘기고 싶을 정도다. 무자비한 자연에 더해 아름답지도 않고 자비를 모르는 인간사회에서 다들 기적처럼 살아간다. 갸륵하고 거룩하다!

황인숙 시인
#풀눈꽃눈#이향지#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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