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진흥왕… 개성상인… 전형필… 한국의 메세나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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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예술사/송지원 등 지음/436쪽·2만6000원·글항아리

친일로 부를 쌓은 집에서 겸재 정선의 화첩을 불쏘시개로 쓰던 시절, 서울의 으뜸가는 부잣집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 달랑 그릇 하나를 기와집 열 채 값에 사는 위인이었다. “집안 말아먹을 철부지”란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도 낡은 그릇, 낡은 그림, 낡은 책을 사들였다. 마지막 남은 논 1만 마지기도 일본에 넘어간 사기그릇을 사는 데 썼다.

그는 간송 전형필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훈민정음해례본(국보 제70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제135호) 등이 그 덕분에 이 땅에 남았다. 그가 남긴 유산은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 총 2000여 점에 이른다.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켜낸 간송은 탁월한 심미안을 가진 예술 후원자로 꼽힌다.

송지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외 6명의 필자가 엮은 이 책은 우리 역사 속 예술 후원자들을 조명한다. 2000년 전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륵의 가야금 기예를 아꼈던 진흥왕이 있었고, 고려 무신정권 때는 팔만대장경 경판을 남긴 최씨 정권이 있었다. 조선의 안동 김씨 가문은 정선 등을 후원하며 인문을 펼쳤다. 근대엔 개성 삼인방이라 불린 거부 이홍근 이회림 윤장섭이 미래 세대를 위한 박물관을 남겼다.

그런데 후원자들의 예술 애호가 순수하기만 할까. 시대의 예술을 꽃피운 후원 활동을 예찬하는 행간에서 ‘후원자들이 문화와 예술이 지니는 사회적 쓰임새를 놓치지 않았다’는 문장에 주목해야 한다. 후원은 예술을 부흥시키는 한편 예술을 이용한다.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술작품의 유통은 창작활동과는 또 다른 차원이기에 예술가는 시대의 권력과 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책은 예술 후원자들이 이끌어 온 한국 예술사를 보여주긴 하지만 예술 후원의 다른 얼굴을 충실히 담지는 않았다. ‘새로 쓰는 예술사’란 책 제목은 그래서 좀 거창하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새로 쓰는 예술사#메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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