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진짜 뺨친 ‘가짜 동방견문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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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더빌 여행기/존 맨더빌 지음·주나미 옮김/448쪽·2만3000원·오롯
동방에 대한 상상과 호기심 엮어… 14세기 유럽에서 폭넓게 읽혀
10여개국선 초대형 베스트셀러… ‘대항해시대’ 이끈 나침반 역할도

보헤미아 지방에서 15세기 초 발간된 ‘맨더빌 여행기’에 수록된 삽화. 저자인 존 맨더빌이 여행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맨더빌이 실존 인물인지, 실제로 이 책을 썼는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오롯 제공
보헤미아 지방에서 15세기 초 발간된 ‘맨더빌 여행기’에 수록된 삽화. 저자인 존 맨더빌이 여행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맨더빌이 실존 인물인지, 실제로 이 책을 썼는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오롯 제공
‘그들은 섬 안에서 자생하는 야생 사과의 냄새로 살아간다. 그래서 고향을 벗어나 먼 곳으로 갈 때에는 그 사과를 챙겨 간다. 사과 향기를 맡지 못하면 금세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섬의 풍습은 다음과 같다. 결혼한 첫날밤에 신랑을 대신해 다른 남자가 신부 옆에 누워 그녀의 처녀성을 취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는 큰 대가와 감사의 인사를 받는다.’

14세기 쓰인 ‘맨더빌 여행기’가 묘사하는 인도지역의 수많은 섬의 풍습이다. 지금 보면 얼토당토않은 얘기지만 동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중세 유럽인에겐 호기심을 샘솟게 하는 지식 창고 같은 책이었다.

동방의 ‘돈둔’이라는 섬 지역에 산다는 기이한 종족들. 왼쪽부터 다리가 말인 종족, 귀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종족, 외눈박이 거인 종족. 오롯 제공
동방의 ‘돈둔’이라는 섬 지역에 산다는 기이한 종족들. 왼쪽부터 다리가 말인 종족, 귀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종족, 외눈박이 거인 종족. 오롯 제공
‘잉글랜드의 세인트올번스에서 태어난 나, 기사 존 맨더빌은 1322년 성미카엘 축일(9월 29일)에 항해를 떠났다’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예루살렘 튀르크 아르메니아 타타르 페르시아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 리비아 칼데아 에티오피아 아마조니아 카타이(중국) 인도 등 동방을 34년간 여행하고 그 진기한 이야기를 썼다고 하고 있다.

존 맨더빌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의 존재는 이 책에 나온 것 말고는 전혀 역사적 근거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맨더빌이 실존했는지, 실제로 그가 지었는지도 미지수다. 게다가 이 책은 가짜다. 저자가 실제 동방을 갔다 와서 쓴 책이 아니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 책은 14세기 중반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71년 프랑스 파리의 샤를 5세의 궁전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 책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해 당시 이미 발간된 동방 관련 30여 권의 책과 유럽에서 전승된 동방 관련 민담들을 적당히 짜깁기하고 자신의 주관적 견해 등을 집어넣어 만들었다.

하지만 동방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중세 유럽인은 사실보다 더 사실 같게 꾸민 이 책에 매력을 느꼈고 진실이라고 믿었다. 이 책은 당시 10여 개국에서 자국어로 출간돼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사본이 300여 종에 이를 정도로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15세기 활판인쇄술이 등장한 뒤에도 가장 활발히 인쇄된 책이 성서 다음으로 이 책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유럽인들에게 이 책이 준 영향은 작지 않다. 콜럼버스가 유라시아 대륙 쪽이 아닌 대서양으로 출항하면서 인도를 발견할 것이라고 꿈꿨던 것도 이 책의 영향이었다. 이 책은 유럽에서 동쪽으로 갈 경우 중국이 먼저 나오고 인도는 수많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고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유럽인에게 신기한 동방 세계를 탐험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켜 ‘대항해 시대’를 연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또 기독교 중심적 사고가 가득하던 유럽인 사이에 이교도에 대한 관용적 태도와 칭찬, 기독교 사회에 대한 비판, 민주주의적 사고 등이 책 곳곳에 나온다는 점도 놀랍다.

‘그들(원주민)은 고유한 신앙에 의지해 온갖 악덕과 악의, 죄악에서 벗어난 도덕적 삶을 살고 있다.’

‘술탄이 그의 방에서 말하길 그리스도교도들이 신을 섬기는 축일에도 술집으로 가서 온종일 술을 먹는다. 예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며 진실하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악한 쪽으로 기울거나 악행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 섬에선 왕을 언제나 선거로 뽑는다. 귀족이나 부자를 뽑지 않고 예절이 바르고 품행이 단정하며 정의롭고 나이가 많고 아이가 없는 사람을 왕으로 선출한다.’

이 책이 국내에서 처음 번역됐다는 것도 놀랍고, 옮긴이가 이 책의 표절 대목을 일일이 확인해 60여 쪽의 ‘옮긴이의 주석’을 만든 것도 칭찬해주고 싶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동방견문록#맨더빌 여행기#대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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